2014 백초월-독립운동가 초월스님의 불꽃같은 삶 > 수상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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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백초월-독립운동가 초월스님의 불꽃같은 삶

저자·역자김광식정가15,000
출간일2014-06-15분야세종도서
책정보페이지: 283판형: 신국판ISBN:97889987422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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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위로 가기 백용성 스님, 한용운 스님과 함께 기억해야 할
또 한 명의 불교계 독립운동가 백 초 월!
│국가보훈처 선정 ‘이달의 독립운동가’(2014년 6월) 백초월 스님의 일대기

임시정부와 독립군을 위해 군자금을 모금하고 항일 비밀 결사 일심교(一心敎)를 조직하는 등, 기지와 열정으로 치열하게 독립운동을 벌인 백초월 스님의 일대기 ????백초월-독립운동가 초월 스님의 불꽃같은 삶????이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민족사에서 나왔다. 저자 김광식(동국대 특임교수)은 불교계의 대표적 독립운동가인 백용성과 한용운을 연구하고 저술 활동을 했다. 그러던 중 백용성과 한용운이 독립운동으로 수감된 후 그들을 대신해 전국 불교도 독립운동본부를 이끌었던 백초월에 주목하여 연구를 계속해 왔다. 2009년 진관사에서 백초월의 것으로 추정되는 태극기와 「독립신문」, 「자유신종보」, 「신대한신문」 등 독립운동 자료가 발견된 이후 연구에 박차를 가한 그는 20년 동안의 연구 성과물을 세상에 내놓았다.

주목할 점은 중앙학림 학인으로 서울에서 전개한 3·1운동 및 해인사 만세운동의 주역 김봉신이 백초월의 지휘하에 있었다는 점이다. 그런데 백초월은 민족대표인 한용운과 백용성의 지휘하에 있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앞서 언급했듯, 초월이 만해와 용성을 대신하여 불교계 민족 운동을 총지휘하였음을 보여준다.-본문 중에서

백초월은 아직 대중에게 널리 알려지지 않았지만 한국 독립운동사에 큰 공적을 이룬 스님이다. 20대 후반에 강백을 역임할 정도로 실력자였던 그는 3·1운동이 일어나자 일제의 탄압에 굴하지 않고 불교계 독립운동을 진두지휘했다. 저자는 사진, 옛 신문 기사, 공판 기록, 일본 첩보문서, 관련 인물의 인터뷰 등 다양한 자료를 동원해 백초월의 행적을 밝히면서 그에 대한 기억을 되살리고 있다.

겉으로는 일심교(一心敎)로 포교 활동,
실제로는 독립운동 준비
│기지와 열정으로 독립운동을 이끈 백초월 스님의 치열한 삶

3·1운동으로 백용성과 한용운 등 불교계 독립운동가들이 수감되자 백초월은 1919년 경성중앙학림 내에 한국민단본부라는 비밀 단체를 조직하고 항일 운동을 전개했다. 전국 불교도 독립운동본부 격인 이 단체를 이끌면서 그는 지하 신문인 「혁신공보」를 제작해 배포하고 민단본부의 부원을 통해 군자금을 모집하는 등 여러 가지 방법으로 일제에 투항했다. 항일 승려들을 임시정부 및 독립 부대에 보내기도 하였다. 군자금 모집과 1920년 일본의회 독립청원 활동을 이유로 일제에 체포된 백초월은 모진 고문을 당했으나 상한 몸을 추스르며 포교당에서 일심(一心) 사상을 강연했다. 저자는 이때 백초월이 이 사상을 독립운동의 이론으로 활용하기로 결심했을 것이라고 보고 있다. 즉 외면적인 포교 활동을 통해 자신의 항일 이념 및 독립운동을 숨겼다는 것이다.

주목되는 것은 1921년 12월, ‘일심만능’이라는 제목으로 했던 강연이다. 일제 측 비밀 문서에는 이 무렵부터 초월이 독립운동 차원에서 일심교 사상을 전파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 그래서 초월은 대담하게도 일본 불교가 주관하는 강연회에서 자신의 입론을 공개적으로 선전했던 것이다. 이는 일면으로는 자신의 독립운동을 숨기면서, 한편으로는 그러한 자리를 자신이 비장하고 있는 항일 이념을 시험하는 무대로 활용한 것이다.-본문 중에서

이처럼 백초월은 고문으로 몸이 부서지고 일제의 감시를 받으면서도 오히려 기지를 발휘해 독립운동을 도모했다. 저자는 “백초월의 일심교 및 일심회라는 항일 비밀 결사체는 일제하 불교계 독립운동사에서 유일한 것”이며 나아가 “국내 독립운동사에서도 특별하고 희귀한 사례인 것이 분명”하다면서 백초월의 혼과 기백을 찾아 역사 속에서 그를 복권하자고 강력히 주장한다. 또한 그는 수집한 증언과 증거들을 토대로 백초월의 항일 활동이 한 개인이 아닌 전국적인 조직망을 통해 전개됐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이러한 역사적 사실에 숨결을 불어넣어야 한다고 불교계와 학계에 호소하고 있다.

고문으로 옥사하는 그날까지
하화중생(下化衆生)의 보살도를 갔던 큰스님
│‘불교는 인간화하기 위해 생겼으며, 행동하는 자들을 호위하는 종교’

1939년에 백초월은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기 위해 군용 열차에 ‘대한독립만세’라고 낙서하는 사건을 주도하여 다시 일제에 체포됐다. 이후 그는 옥살이를 하다가 1944년 6월 29일, 해방을 1년 앞두고 청주 교도소에서 끝내 순국하였다. 저자는 백초월이 일제에 맞서 그토록 열정적으로 싸웠던 근원을 그의 불교 사상에서 찾고 있다.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중생 구제, 즉 하화중생(下化衆生)의 차원에서 일제의 국권 강탈 및 민중 탄압에 맞서 싸웠다는 것이다. 중생 구제를 위해서는 지엽적인 계율에 얽매이지 말아야 하며, 불교와 승려가 전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던 초월의 사상은 오늘날 불교의 현실에도 적잖은 시사점을 던져준다.

초월은 불교가 인간화하기 위해 생겼으며, 행동하는 자들을 호위하는 종교라고 주장하면서 불교는 현실에 토착화해야 한다고 거듭 강조하였다. (…) 즉 초월은 지엽적인 계율에 얽매이지 말며, 중생 구제를 위해 불교와 승려가 전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초월은 바로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 대승불교의 섭중생계(攝衆生戒)를 강조했던 것이다. 말하자면 중생 구제 그것이 승려 및 계율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리하여 그는 일제가 국권을 강탈하고 민중을 착취 및 탄압하는 것에 결연히 맞서 싸웠던 것이다.
-본문 중에서

저자는 “일제하 독립운동사에서 옥중 순국한 독립운동가로 단재 신채호, 독립군 지도자 김동삼, 그리고 백초월 3인이 손꼽힌다”고 하면서 그중 유독 백초월의 연구가 활발하지 않은 점을 못내 아쉬워하고 있다. 독립운동 끝에 옥사하는 치열한 삶을 살았으나 무관심 속에서 잊혀 가고 있는 큰스님 백초월. 그 치열한 삶과 함께 한국 독립운동사 속에 그를 편입시키려는 저자의 헌신적인 노력이 감동으로 다가온다. ????백초월-독립운동가 초월 스님의 불꽃같은 삶????의 출간으로 백초월을 비롯해 세월 속에 망각돼 가는 순국선열들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 그들의 위대한 행적이 낱낱이 밝혀지기를 고대해 본다.

책에는 조영암 스님의 ‘구국당 백초월 대선사 옥사 순국록’, 고은의 추모시 ‘백초월 스님’ 등 부록과 백초월의 일대기를 요약한 연보를 함께 실었다. 묵죽도 등 그가 남긴 유묵 사진을 제공해 품격 있는 예술가·서예가로서의 백초월도 만나볼 수 있다.


■ 1919년 4월부터 1920년 5월까지 (…) 근 1여 년 동안 백초월은 독립운동의 다양한 행적을 남겼다. 우리는 여기에서 그가 국내외를 망라해 독립운동을 추진하였으며, 중앙학림 학인들과 혼연일체가 되어 상해 임시정부를 배경으로 활동하면서, 3·1운동 직후 급증한 불교계 독립운동의 중심에 섰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그는 신상완, 이종욱 등을 매개로 상해 임시정부와 긴밀한 협조 관계를 구축하였다. 또한 그는 박달준, 김장윤, 김봉율 등을 매개로 만주 지역 독립군을 후원하는 조직체를 갖고 있었다.-본문 p.93
■ 이처럼 백초월은 1922년 초반 동안 조선불교대회와 연계하여 불교 강연회의 연사로 나섰다. 또한 그는 불교중앙포교소와 관련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매일신보」 1922년 1월 5일 기록에는 “본 교당 백초월사(白初月師)”라는 내용이 나온다.그런데 여기서 문제 되는 것은 조선불교대회와 불교중앙포교소의 성격이다. 조선불교대회는 1921년 11월에 출범한 불교 단체인데, 재한 일본 불교도들이 주축이 되어 이 단체를 조직하였다. 여기에는 일본 불교에 우호적인 한국 측의 재가 불자가 대거 가담하였다. 요컨대 이 단체의 노선 및 성격이 일본 불교 및 조선총독부의 식민 통치에 우호적인 재가 불교 단체였다.-본문 p.107
■ 일제의 첩보 문건에는 백초월의 항일 활동과 일심교에 대한 내용이 상세하게 나온다. 그것에 따르면 백초월은 1918년 청주 용화사에서 포교사로 활동하던 시절에 ????화엄경????의 ‘통만법명일심(統萬法明一心)’이라는 구절에 착안하여 일심(一心)에 따라 독립운동을 추진할 수 있다는 신념을 갖게 되었다. 3·1운동을 지속하는 등 다양한 독립운동을 전개하다 일제에 체포되어 갖은 고문을 받자, 그는 휴식을 취하던 1921년부터 본격적으로 일심교 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는 3대 강령, 즉 일심만능(一心萬能), 군교통일(群敎統一), 세계평화(世界平和)를 표방하면서 동지를 모았다. 이때에 그는 비공식적으로 지하에서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1926년부터는 마포의 진관사 포교당에 일심교 사무소를 차리고 조직 활동을 확대·강화하였다. 백초월은 이렇듯 노력을 들여 많은 동지를 포섭하고, 자금도 모금하면서 일심회라는 조직체를 결성하였다.-본문 p.124
■ ≪그 사람은 자기 집이 정미소를 해서 돈도 많이 벌고, 부자였는데 자기 아버지가 초월 스님에게 군자금을 계속해서 주어서 가세가 기울었다고 그랬습니다. 자기 집의 뒷마당에는 대나무밭이 있었는데, 자기가 어릴 때에 아버지가 대나무밭의 옆에다가 항아리를 묻어 놓고, 거기에다 아버지가 계속 돈을 묻어두는 것을 봤답니다. 그러면 초월 스님의 밑에 있는 사람이 와서 그 돈을 가져간다고 그랬어요. 그래서 그 사람은 호기심으로 돈을 집어넣은 며칠 후에 단지에 가보면 돈을 가져가고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초월 스님을 돌중이라고 그랬습니다. 나는 속으로 기분이 나빴어요. 그래 왜 그렇게 생각하냐고 물어보니깐, 그 당시는 절에서 염불이나 불공을 하는 것이 스님인데 백초월 스님은 말만 스님이지 독립운동을 하면서 전국을 안 다니는 곳이 없을 정도이니 그래서 자기는 스님으로 볼 수 없어서 돌중이라고 부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아버지도 돈을 묻으면서 “이거는 돌중에게 갖다 주는 것”이라고 그런 말을 했다고 그랬어요. (…)≫양산 정미소 주인에 대한 구술은 일심회 조직원들이 독립운동에 동참하여 활동하는 내용을 보여준다. 이 구술에는 백초월이 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하여, 독립 자금을 제공하는 장면이 생생하게 나타난다. 우리는 이 구술에서, 독립 자금 기부로 가세가 기울 정도로 그에게 독립정신이 강렬히 일었고, 활동 또한 치열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여기에서도 일심회의 조직체가 비밀 결사체였고, 조직이 분화됐었다는 사실을 엿볼 수 있다.-본문 pp.131~2
■ 눈길을 끄는 대목은, 그에게 강한 민족정신이 용솟음쳤다는 것과 그가 비록 관헌에게는 미치광이나 바보로 행세했지만, 세상 사람들에게는 독립정신을 불어넣고 있었다는 부분이다. 한편 그 시절 백초월은 방 안에 죽은 거북이를 보자기에 싸 두고, 아침저녁으로 거북이를 바라보면서 참선을 했다고 한다. 이 시기에도 일본 형사가 정기적으로 동학사를 내왕하여 백초월을 감시하였는데, 일본 형사가 와서 초월의 방을 쳐다보면 초월은 죽은 거북이에게 알 수 없는 말을 하였다. 그래서 일본 형사는 백초월을 정신이상자로 알게 되었다. 또한 간혹, 백초월이 방안에서 거북이의 노래를 불렀다고 당시 강원의 학인이었던 금암 노스님이 증언하였다. 이 같은 사실로 볼 때, 우리는 그의 민족정신과 독립운동에 대한 열정이 동학사 강사 시절에도 전혀 죽지 않았다는 것을 거듭 확인할 수 있다.-본문 pp.143~4
■ 초월은 불교가 인간화하기 위해 생겼으며, 행동하는 자들을 호위하는 종교라고 주장하면서 불교는 현실에 토착화해야 한다고 거듭 강조하였다. 이와 같은 초월의 논지는 그의 기고문 서두에서 나온다. ≪섭중생계(攝衆生戒)에는 도중생(度衆生)이 지(持)가 되고 불도중생(不度衆生)이면 범(犯)이 되나니 여기에서는 비록 일(一) 중생을 위하여 무량죄(無量罪)를 짓고 삼악도(三惡道)에 떨어져서 백십겁(百十劫)을 지나더라도 중생만 제도(濟度)되는 사(事)이면 그것을 행(行)하나니 여기에서는 섭율의계(攝律儀戒)나 섭선법계(攝善法戒) 같은 것은 중요시하지 않는다.≫즉 초월은 지엽적인 계율에 얽매이지 말며, 중생 구제를 위해 불교와 승려가 전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초월은 바로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 대승불교의 섭중생계(攝衆生戒)를 강조했던 것이다. 말하자면 중생 구제 그것이 승려 및 계율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리하여 그는 일제가 국권을 강탈하고 민중을 착취 및 탄압하는 것에 결연히 맞서 싸웠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초월의 독립운동이 불교 사상에 입각하여 추진됐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동시에, 그의 불교 사상의 깊이가 매우 깊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본문 pp.160~1
■ 1939년 10월, 초월과 일심회가 민족의식을 고취시킬 거사를 단행했던 것이다. 용산역에서 민족의식을 용감무쌍하게 보여줌으로써 중일전쟁의 구도를 깨고, 그로 인해 동포들에게 경각심을 불어넣으며, 만주로 끌려가는 청년들에게는 민족을 절대 잊지 말라는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것이었다. 용산역에서 만주로 가는 군용열차에 ‘대한독립만세’라는 격문을 작성했던 사건은 이런 배경에서 단행되었다. 백초월은 이 사건으로 체포되어 고문과 징역형을 당했으며, 그와 뜻을 함께했던 동지 70여 명도 체포되는 등 이는 대사건이었다.-본문 p.168
■ 일제의 「경성지방법원 편철자료」의 비밀 첩보 문건을 통하여 일심교의 개요 및 성격, 그리고 1939년 용산역 독립 만세 낙서 사건에 대한 전모와 추이 등을 알 수 있었다. 그 사건의 일지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1939. 10. 11: 일심교, 일심회의 차원에서 백초월을 비롯한 6인의 동지가 육군지원병 제도를 반대하면서 반일·민족 사상을 주입·선전하기 위한 차원에서 용산역 수송 열차에 민족적인 낙서를 쓰기로 결정.10. 14: 낙서 감행10. 16: 낙서 발견10. 23: 낙서 용의자로 박수남 체포배후 주동자로 백초월 체포12. 23: 일제가 관계자(6인) 검거, 사건 개요 완전 파악이제 낙서 사건은 운동의 목적, 지향 등에서 분명한 항일 독립운동이라고 이해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운동은 백초월 및 일심회의 치밀한 기획·구상에 의해서 단행된 것이기에 한국 독립운동사, 불교 독립운동사에 당당하게 편입시켜야 할 것이다.-본문 pp.182~3
■ [조영암은] 일제 시대 때, 그가 출가한 건봉사로 내려와서 특강을 하였던 만해 한용운에게, 경학 공부를 하려면 어느 스님을 찾아가면 되냐고 질문하였다. 그러자 만해는 백초월 스님을 찾아가라고 단박에 일러주었다. 그래서 그는 초월 스님이 월정사 강원에 있다는 것을 찾아내 월정사로 가서 배움을 청한 것이 초월과의 인연의 시작이었다고 백외식에게 털어놓았다.-본문 p.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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