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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붓다 프로젝트

저자·역자원담 저정가18,500
출간일2016-03-10분야불교출판문화상
책정보페이지: 438판형: 신국판ISBN:9788998742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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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위로 가기 이번에 민족사에서 출간한 《붓다 프로젝트》는 고따마 싯다르타의 인간적인 모습은 물론, 그의 가족과 제자들과의 에피소드가 감동적으로 그려지는 동시에, 붓다 당시의 사회적 모순, 갈등을 풀어가는 붓다식 해결 방법 등이 제시되어 있다. 저자는 이를 통해 현대인들의 욕망, 현대 사회의 모순 등을 비판하고 우리가 지향해야 할 대안적 삶의 형태를 보여준다. 이 책의 초점은 후자에 있다. 저자 원담 스님은 약 2600년 전에 살았던 고따마 싯다르타라는 ‘인간’의 삶을 재조명함으로써 지금 우리의 삶을 돌아보게 한다.
이제까지 붓다의 생애를 주제로 한 책들이 주로 붓다 개인의 수행이나 붓다 당시의 시대적 배경에 주목했다면, 《붓다 프로젝트》는 붓다의 눈으로 본 현대인들의 삶에 대해 집중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특히 의식 혁명을 이룬 혁명가 붓다가 이끄는 행복의 길을 이해하기 위해 지금 우리 현실 사회의 문제를 심도 있게 다루고 있다.
이 책은 붓다의 생애를 연대기 순으로 따라가면서, 그의 가르침을 프리드리히 니체, 칼 마르크스,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 알렉시스 토크빌 등 근현대 정치 ‧ 철학가들의 사상과 견주고, 붓다의 삶(보살의 삶)을 체 게바라와 같은 혁명가의 삶과 비교한다. 또 영화 <매트릭스>, <설국열차> 등을 예로 들어 자본주의 체제와 그 안에 사는 인간들의 삶을 통찰하기도 한다. 저자는 지금 우리를 괴롭히고 있는 온갖 욕망들이 자본주의 체제를 떠나 만들어진 게 아니라고 말한다. 개인의 마음은 사회적 조건에 뿌리 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둘을 함께 가꿔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지금 한국 사람이 살아가는 현실을 보세요. 먹고사는 문제 때문에 피를 말리고, 돈 있는 사람은 돈 없는 사람을 제멋대로 다루며 그들을 비굴하게 만들고, 힘 있는 사람은 법을 뛰어넘고 힘없는 사람은 짓밟히는 사회 아닙니까? 인정이 사라지고 나눔과 섬김이 없는 사회, 아이를 낳아 기르고 싶지 않은 사회, 조금이라도 의견이 다르면 배척하며 해하려는 사회가 아닙니까? 더 심각한 건 종교가 사회를 분열시키고 사람들을 우매하게 만든다는 겁니다. 사회지도층이라는 사람들은 예의염치가 없지요. 2600년 전 싯다르타가 살았던 시대도 지금과 상황은 비슷하였기에 그가 살아갔던 삶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다음과 같은 영감과 지혜를 줍니다.” ―저자 인터뷰 중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을 보자. 먹고살기는 더 힘들어 지고, 꿈도 희망도 보이지 않는다고 말하는 이들이 늘고 있다. 인정이 사라지고, 권력의 맛에 취한 종교조차 사람들의 의지처가 되지 못하고 있다. 저자는 묻는다. 우리는 무엇을 더 갖고, 무엇을 더 이루고, 얼마나 더 많이 성공해야 이 허무와 불안을 이겨낼 수 있을까? 이런 사회에 그냥 순응하면서 살아가야 하는가? 돈, 권력, 명예, 지식 등 무조건 남보다 많이 소유한다고 해서 행복한가?
저자 원담 스님은 “절대 다수가 불행한데 어찌 자기 홀로 행복할 수 있으랴? 타인의 불행에 포위된 자기만의 행복이란 환상에 불과하다.”(p.357)라고 잘라 말한다. 그렇다고 해서 원담 스님이 지금의 현실을 비관적으로만 바라보고 있는 것은 아니다. 원담 스님은 지금이 새로운 희망의 길을 찾아야 할 때, 우리 스스로 붓다가 되는 실험을 할 때라고 선언한다. ‘붓다 프로젝트’가 우리에게 지극한 평화와 행복을 선물할 것이라고 말한다.

“내 의식에 깃든 탐욕, 공격성, 무지가 소멸할 때 나의 존재 자체가 평화가 된다. 그리고 그 평화는 타인을 감화시켜 평화로 인도한다.”(p.268)

《붓다 프로젝트》는 붓다가 들려주는 지혜로운 해법에 귀 기울이고 있다. 그리고 2600여 년 전, 보리수나무 아래에서 깨달아 붓다가 된 싯다르타처럼, 세상의 모든 이들이 깨어날 수 있다는 서원이 담겨져 있다. 이 책에 실린 글 하나하나는 우리 스스로 붓다라는 등불을 쥐고 번뇌에서 행복으로, 허무와 불안을 벗어나 스스로 자신을 치유하는 길을 갈 수 있도록 이끌어 준다.
이 책은 한때 민중의 모든 고통과 운명을 짊어진 것 같은 책임감에 짓눌려 방황하던 사회 운동가가 출가하여 수행을 통해 얻은 깨달음의 에센스로서 좌절과 원망, 허무와 불안 속에서 허우적대는 이 시대 모든 이들에게 전하는 희망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



■ 아트만 프로젝트 vs 붓다 프로젝트

‘붓다 프로젝트’란 말은 켄 윌버의 ‘아트만 프로젝트’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저자 원담 스님이 만들어낸 말이다.
켄 윌버(Ken Wilber, 1949~)는 이 시대의 석학 가운데 한 사람으로, 23세에 《의식의 스펙트럼-닫힌 의식의 문을 여는 스펙트럼 심리학》을 저술한 이래 자아초월심리학Transpersonal Psychology이란 분야를 개척하여 심리학의 패러다임을 바꾼 인물이다. 《무경계》, 《모든 것의 역사》 등 한국에서도 그의 책들이 다양하게 소개되고 있다.
켄 윌버가 만든 용어인 ‘아트만 프로젝트’는 아트만(atman), 다른 말로 ‘영혼soul’, ‘자아self’, ‘에고ego’가 자기를 실현하기 위해 시공간을 무대로 인위적인 것을 창조해내는 활동을 말한다. 그에 따르면 인간이 건립한 문명과 역사가 전부 아트만의 투사이며 아트만의 사업 즉 ‘아트만 프로젝트’의 결과이다. 그것은 ‘자기보존 욕구에 갇힌 에고’가 에고를 무한히 확장하여 ‘신적인 나神我’, ‘우주적인 나梵我’, ‘영원불사의 나’를 누리고자 하는 활동이었다. 전 세계의 자본주의화, 군사적 패권주의, 불평등의 심화, 환경파괴 등은 모두 이 아트만 프로젝트의 결과이다.
‘붓다 프로젝트’는 이런 아트만 프로젝트와 대척점에 있는 것이다. 에고를 강화하기 위해 만들어진 장치들이 아트만 프로젝트의 결과라면, 붓다 프로젝트는 에고가 사라질 때완성되는 고요한 평화의 경지를 추구한다. 에고를 해체(무아無我An-atman)함으로써 갈등과 초조, 애씀과 자기소모, 헛된 열정과 투쟁이 완전히 사라진 고요하고 청량한 지복을 위한 실험이 바로 ‘붓다 프로젝트’의 의미이다.
요컨대 ‘아트만 프로젝트’가 ‘자기(ego)’라는 울타리와 한계에 갇혀 있는 것이라면, ‘붓다 프로젝트’는 ‘자기(ego)’를 훌쩍 뛰어넘어 내 삶의 주인이자 이 세상의 주인공으로 살고자 하는 것이다.

◆‘설국열차Snowpiercer’는 윤회하는 세계를 상징한다. 고정된 무한궤도를 끝없이 맴도는 열차를 타고 있는 우리들. 열차를 움직이는 엔진은 무엇인가? 윤회를 이끄는 힘은 무엇인가? 맹목적 생존의지와 보호본능, 군집본능과 권력의지이다. 설국열차의 설계자이며 기관사인 윌포드Wilford도 철판으로 밀폐된 직육면체의 ‘설국열차’란 공간에 갇힌 한낱 승객에 지나지 않는다. 꼬리 칸Tail Section에 탄 사람들에게는 신적인 존재도 열차란 좁은 공간에 갇힌 죄수일 뿐. 열차를 타고 있는 그 누구도 열차를 세울 수 없고 진로를 통제할 수 없다. 열차 안에서 벌어지는 반란과 권력투쟁, 교육과 문화, 진보와 복지조차도 ‘열차’란 시스템의 균형을 유지하는 장치일 뿐이다. 열차 안에서 생존하는 일상인의 차원을 벗어나 자유와 해방을 꿈꾸는 자에겐 열차의 엔진을 장악하여 권력을 탈취하는 일과 열차에서 뛰어내리는 일, 이 두 가지의 선택 앞에 놓인다. (……) ‘출세하라, 높은 자리에 오르라. 을乙을 짓밟는 갑甲이 되라. 성공해라. 경쟁에서 이겨라’라고 가르치는 사회에서 당신은 권력자가 되고 싶을 것이다. 그러니 조심하라. 당신은 윌포드의 하수인으로 전락해서 양심을 저버리게 될 것이다. 열차를 움직이는 권력을 얻기 위해서 당신은 가슴 속의 다섯 살 동심을 희생시키고 말 것이다. 양심을 저버린 당신은 윌포드가 준 구두를 신게 된다. 윌포드의 하수인 총리 역을 맡은 메이슨Mason은 이렇게 말한다.
“구두가 발에 있지 않고 머리에 있으면 정상일까? 당연히 아니다. 자기의 위치, 역할을 지키는 게 여러분의 사명이다.”
(……) 과연 누가 윤회가 고통이라는 통찰과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을 보여줄 수 있을까? 영화에는 보안장치 설계 담당자인 ‘남궁민수’가 등장한다. 그는 열차 밖으로 나가는 방법과 열차 밖의 세계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있다. 그는 붓다의 지혜의 등불法燈을 계승받은 전법자임이 틀림이 없다. 왜냐? 세계의 모든 종교와 철학은 모두 열차 안의 일이요, 열차 안에서 안주하라고 가르치는 메시지가 은밀하게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사회주의, 모든 철학, 기독교, 천주교, 이슬람의 천국이나 힌두이즘의 삼매경과 도교의 우화등선羽化登仙 무위자연無爲自然도 모두 열차 안의 경지요, 윌포드와 길리엄Gilliam의 변형이다. 열차 밖으로 나간다는 상상은 위험하다. 그것은 기존 체제에 대해 총체적인 의문을 제기하면서 체제 유지에 순응하기를 거부하기 때문이다. 남궁민수는 이렇게 생각한다.
‘저게 하도 오래 닫혀 있으니깐 이젠 벽Wall처럼 느껴지기도 하는데, 실은 저것도 문Gate이란 말이야!’
(……) 윤회가 끝난 경지를 열반이라 한다. 그것은 생명이 죽어버린 빙하기가 아니다. 지극한 평화, 최고의 행복summum bonum, 청정한 기쁨santi sukha, 온화함soracca, 속박으로부터 안온함yoga-khema, 모든 슬픔의 화살을 뽑아버린 곳이다.
자, 불자들이여. 설국열차를 폭파시키자. (……) 윤회하는 세계를 벗어나자. 찬란한 소멸이여, 지극한 행복이어라.(pp.76-81, <싯다르타가 설국열차를 타면 어떻게 될까?> 중에서)


◆‘아, 세간의 모든 중생이 생존경쟁을 하면서 서로를 해하고 다투면서 극심한 고통을 받고 있으니 나는 이제 조용하고 한적한 곳을 찾아서 이러한 모든 괴로움을 해결할 방도를 생각해야겠다.’
열세 살 소년 싯다르타는 이런 고민에 빠진다. 타인의 고통에 대한 감수성을 타고난 그는 충분히 그러고도 남았으리라. 태어나서 처음으로 왕궁을 벗어나 농민들이 일하는 현장을 목격한 그는 왕족 신분으로 누리는 자기의 모든 안락과 편의가 백성의 노동과 희생에서 나오는 것임을 똑똑히 알게 되었다. 그는 양심의 가책을 느낀다.
‘내가 누리는 안락과 편안함이 타인의 수고와 희생에 의존하고 있었구나!
안락한 내 삶이 내가 잘나서 당연히 누려야 하는 것이 아니었구나!
타인의 수고와 희생에 의존하는 왕궁의 호사와 행복이 얼마나 부조리한가!
나는 백성의 노동과 희생에 의존하여 살아가고 싶지 않다.
나는 내가 살기 위해서 그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으리라.
내가 힘들면 힘들었지, 내가 죽으면 죽었지, 타인에게 해를 끼치면서 타인을 희생시키면서 까지 나의 생존을 구하지 않으리라.’ (……) 시대가 바뀌고 체제가 변하여도 인간 사회는 부의 불평등, 지배와 피지배가 존재한다. 사회 물정에 눈뜨는 청소년기는 사회 부조리와 정치경제 체제의 모순이 가슴을 찌르듯이 느껴지는 시절이다. 이때는 반성적 자각이 눈뜨는 시기며, 부정과 반항이 싹트는 시기다. 이 시기는 유년기에서 청년기로 이행하는 성장 과정이기에 질풍노도의 사춘기와 겹친다. 싯다르타는 사회의 실상을 보는 눈이 열리기 시작했다. 더구나 자연을 관찰하는 예리한 눈이 깨어났다. 약육강식의 현실을 직관했다. 강한 놈이 약한 놈을 잡아먹고, 약한 것이 강한 것에 잡아먹히는 자연의 질서에 가슴 애린 고통을 느꼈다. 이는 범상하지 않은 징조다. 보통 사람은 그런 걸 대수롭지 않게 보고 오히려 당연하다고 느낀다. 그게 자연인 걸, 동물들이 다 그렇지 뭐, 이렇게 생각할 텐데 싯다르타는 당연한 것을 당연하게 보지 않는다.
‘왜 생명들은 서로에게 해를 끼치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는가? 왜 강한 놈은 약한 놈을 잡아먹어야만 하는가? 약한 놈을 잡아먹고 살아남은 강자의 말로는 무엇인가? 무엇을 위해서 살아남아야 하는가? 왜 ‘내’가 꼭 살아남아야 한단 말인가? ‘나’말고 다른 것, 다른 사람이 살아남으면 안 되는가? 먹거나 먹히거나, 살아남거나 죽임을 당하거나 하는 이런 긴장과 불안, 공포와 강박감을 넘어선 평화와 안심의 길은 없는가? 왜 약육강식으로만 생존이 가능하단 말인가? 생명이 서로 해하지 않고 공존하는 길은 없단 말인가?’
싯다르타는 냉혹하고 비정해 보이는 자연의 질서에 근본적인 의문을 던진다.
(pp.43-46, <잠부나무 아래서 고뇌하는 소년> 중에서)


◆싯다르타는 열세 살 나이에 사회적 부조리에 대하여 고민한다. 그리고 약육강식이란 생명일반의 실존적 부조리를 자각한다. 싯다르타가 농경제 행사에 참관했을 때 농부가 뙤약볕 아래 힘겹게 쟁기질을 하는 광경을 보고, 자신이 누리는 안락과 호사가 백성의 노고와 희생으로부터 왔다는 사실을 목격한다. 싯다르타는 너무나 미안하여 온몸이 떨려온다. (……) 먹이 사슬에 얽매인 삶은 내가 살기 위해서 남의 몫을 뺏어야 하는 것이 불가피하다. 인간의 고통은 ‘먹은 죄’에서 온다. 어느 누구도 예외가 없다. 다른 생명을 취해야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은 모든 생명의 슬픈 운명이다. 이런 세계를 일러 ‘욕계欲界kama-loka(욕망의 세계)’라 한다.
싯다르타는 약한 자, 낮은 자, 가난한 자의 처지에 서서 세상을 보았다. 그렇게 해서 생명 일반의 고통에 대한 진실에 눈을 뜨게 된다. 훗날 이 진실을 ‘고성제苦聖諦’라고 명명하였다. 여기에서 말하는 ‘고’는 개인의 실존적인 고통이면서도 사회관계에서 발생하는 부조리다. 이는 지상에 생존하는 생명 일반의 보편적인 고통이다. 욕계에 얽매인 중생은 고통의 늪에 빠져서 허우적거린다. 움직일수록 더 빠져든다.
싯다르타는 권력자로 태어났고, 권력을 사용하는 법을 다 배웠기 때문에 권력이 잘못 사용되면 어떤 고통을 가져오는지 잘 안다. 그래서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남을 해치지 말라. 남을 다치게 하지 말라. 남의 몸과 마음에 상처를 주지 말라. 너의 몸짓 하나, 너의 말 한 마디, 너의 한 생각으로도 남을 해치지 말라. 생명을 죽이지 말라. 사람뿐만 아니라 동물도 해치지 말고 죽이지 말라.’ 이것이 바로 ‘남을 해하지 말라, 남에게 어떤 식으로든지 상처를 주지 말라’는 불상해不傷害법이다. 나아가 남에게 두려움을 주는 몸짓이나 말이나 생각조차도 일으키지 말라. 남을 죽이지 않으면 안 될 상황이라면 차라리 네 생명을 던져라. 네가 죽어 타인을 살릴 수 있다면 네 생명을 내려놓으라. 나아가 모든 생명을 살려주어라(방생放生). 죽게 된 상황에 빠진 생명을 구해주어라. 사람을 널리 이익 되게 하라. 생명에게 이익을 베풀어라.(pp.47-50, <남을 해치지 말라-싯다르타의 눈뜸> 중에서)


◆ “무엇보다도 먼저, 이 세상 어느 곳에서든지 어떤 사람에게 가해지는 불의에 대해서 항상 깊이 공감할 수 있는 것이야말로 혁명가가 가진 가장 아름다운 덕목이다.”
이것은 체 게바라(Che Guevara, 1928~1967, 쿠바의 공산주의자, 혁명가)가 사형에 처해지기 전에 가족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의 일부다.
“모든 생명의 고통을 대신 받으리라. 내가 편안할 때 중생의 고통을 잊지 않고, 고통의 현장에 함께 있으면서 그들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바르고 원만한 깨달음을 이루리라.”
이것은 대승불교도의 발원이다. 체 게바라와 대승불교도, 이 둘은 같은 마음인가, 아닌가? 같다면 어디까지 같고, 다르다면 어디가 어떻게 다른가?
불교의 지혜는 생로병사의 고통을 자각하여 그 해결을 찾는 데 주력하며, 사회구조적 각성은 인간은 각자의 사회경제적 조건에 따라 다르게 고통을 겪는다는 사실을 알아차린다. 고통의 사회경제적 조건을 정확히 인식할 때 고통을 없애는 사회적 실천이 가능하다. 불교수행자이며 학자인 데이비드 로이(David Loy, 1947~)는 탐욕, 분노, 무지를 ‘자본주의 시장경제’, ‘군산복합체’, ‘상업미디어’의 제도화된 삼독으로 설명한 바 있다. 이런 맥락에서 자본주의와 다국적 기업의 군산복합체가 세계인민의 빈곤과 부조리의 원인이 된다고 본 체 게바라의 관점은 공감할 만하다. 그런데 그는 사회의 구조적 문제를 게릴라 투쟁을 통한 체제혁명으로 해결하려 했다. 그는 평화와 정의로운 공동체의 도래를 위해서는 폭력을 수단으로 사용할 수 있다고 봤던 것이다. 불자는 이런 문제 해결 방식에는 공감할 수 없다. 불자는 어떤 경우에도 폭력 사용을 반대한다. 싯다르타가 선택한 문제해결 방식을 보라.
싯다르타도 게바라와 같은 고민을 했었다. 싯다르타는 자기에게 주어진 기득권을 완전히 포기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했다. 그는 민중에게 고통을 주는 정치경제 체제와 계급제도를 아예 떠났다. 왕위를 버리고 가족과 사회를 떠났다. 그는 탈체제적으로 살아가기로 작정했다. 반강권주의 · 무정부주의적인 삶의 방식을 택한 것이다. 의식주는 탁발과 타인의 호의에 의존하여 해결했다. 이것은 탈자본주의적counter-capitalistic 삶의 방식이다. 싯다르타는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대중이 이런 나의 삶의 방식을 이해하여, 밥을 주고 옷과 거처를 제공해준다면 나는 살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난 이 세상을 깨끗이 떠나리라. 인민에게 이익이 되지 못하는 삶(정신적으로든지 물질적으로든지)은 자진해서 사라지는 것만 못하리라.’
세속의 이해관계에서 멀리 떠났기에, 그는 체제의 부조리와 세상 사람들의 심리를 꿰뚫어 볼 수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인간고의 근원적인 원인을 사회경제 체제가 아니라 인간 내면에 깃든 맹목적 생존의지와 이기적 충동, 탐욕과 분노, 무지에서 찾았다. 이를 통해 무력혁명을 통한 체제전복이 아닌 방식으로, 인간이 완벽한 평화를 실현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것은 의식의 혁명이며 체제 안에서 일으킬 수 있는 내적인 혁명이다. 혁명은 무력이 아니라 평화로, 분노가 아니라 관용과 용기로, 체제순응이 아니라 부정과 관조로 이룰 수 있다.(pp.266-269, <싯다르타와 체 게바라는 어디까지 동행할 수 있을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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