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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6-09-13 오전 10:3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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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00년대 전후의 사진자료 개요

 

이 시기의 불교사는 불교의 중흥과 발전을 기하려는 몸부림 그 자체였다. 초선후기 불교의 사회적 위상을 대변하는 승려의 도성출입금지가 해제된 1895년 직후 불교계는 서서히 변화의 물결에 휘말렸다. 그러나 불교의 위상은 쉽게 찾아오지 않았다. 도성출입금지 해제령도 즉각적으로 파급되지 못하였고, 일시적으로 재금지 조처도 있었다. 그러나 개항, 근대화 물결의 구도에서 불교의 속박은 막을 수 없었다.
이에 불교계는 서서히 서울에서 행사를 치를 수도 있었고, 서구문명과의 접촉도 가시화되었다. 그러나 가장 문제시 된 것은 일본문명, 일본불교와의 접촉이었다. 이는 일본불교를 문명의 중심으로, 그리고 한국불교가 본받아야 할 대상으로 여긴 것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동인이 그 대열의 선두에서 개화와 근대화에 앞장선 것도 그 사정을 반영하는 것이다. 당신 불교계의 인식의 근저에는 이른바 사회진화론의 영향이 있었다. 약육강식, 우승열패라는 시대에서는 선진적인 문명을 따라잡기 위한 불가피한 조처로 수용되었다. 이에 자연적으로 일본불교는 한국불교가 배워야 할 문명의 대상으로 선명히 부각되었다.
또한 이 시기에는 일본불교의 한국 침투가 더욱 드세어졌다. 청일전쟁, 러일전쟁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침투한 일본불교는 각 종파가 경쟁체제하에서 진행되었기에 그 발전의 속도는 놀라운 것이었다. 그렇지만 일본불교는 결과적으로 일제의 한국 침략의 후원자의 성격을 배제할 수는 없는 것이기에, 일본불교의 정체 파악에 미흡했던 한국불교계의 인식은 문제점이 적지 않았다. 일제의 침략에 항거한 의병전쟁이 드세어졌을 때, 한국사찰은 오히려 그 와중의 피해를 줄이려고 일본사찰의 말사에 소속되고자 관리청원을 신청한 일도 있었다.
이러한 배경 하에서 당시 불교계의 움직임에서 주목할 것은 불교 교단의 설립 노력이 두드러졌다는 것이다. 불교의 발전을 담보할 수 있는 조직체로서의 교단은 실로 이전 불교의 정황을 고려하면 눈부신 변화였다. 1902년 당시 구한국정부가 전국의 사찰 및 승려를 통할하기 위한 기관인 사사관리서(寺社管理署)를 설치한 것은 변화된 불교계의 효율적인 관리에 임하려는 자세의 발로였다. 그러나 사찰관리서는 1904년경에 이르러서는 유야무야의 지경에 처하였다. 이는 국운이 위태로운 정황 하에서 나약한 국권의 말로를 대변해주는 것이다. 이러한 지경에 처하자 당시 한국에 진출한 일본불교는 사사관리서가 있던 원흥사를 독점하려는 작태을 감행하기도 하였다.
이후 교단 설립 노력은 선각적인 승려들이 주도한 불교연구회로 이관되었다.
그러나 그들의 노력은 근대적인 최초의 학교인 명진학교 설립에 그치고 보다 진전된 교단 설립은 1908년 전국 사찰 대표들이 원흥사에서 모음을 작고 결의한 원종 창립시까지 기다려야만 했다. 원종을 주도한 승려들은 원종 종무원을 인가받기 위하여 부단히 노력하였다. 심지어는 친일파, 또는 다께다( )같은 일본불교 유력자들에게도 협조와 후원을 기대하였으나 끝내 성사시키지 못하였다. 오히려 원종은 그 인가를 위한 활동에 매달린 결과 한국불교의 위상을 떨어뜨렸다는 비판을 감수해야만 했다.
그러나 이 시기에는 전국 주요 사찰에서 근대 지향의 의식을 일깨우기 위한 자생적인 학교가 다수 등장하였다. 그리고 국권을 회복하기 위한 국채보상운동의 거점이 전국 주요 사찰이 되었다. 경허 스님이 해인사, 범어사 등지에서 전통선의 부흥을 위한 결사를 하였던 점이나, 의병전쟁에 일부 승려가 참여하였던 것은 민족불교 위상을 지키려한 고난의 행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