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도서안내 > 동숭동의 책

 

 
 

  선의 유혹 ; 그득히 빈 산, 거울이로다

   red00_next.gif저   자 : 한태호
   red00_next.gif판   형 : 변형 국판
   red00_next.gif출간일 : 2017-06-30
   red00_next.gif페이지 : 176쪽
   red00_next.gifI S B N : 978-89-7737-030-2(03810)
   red00_next.gif정   가 : \11,000

   red00_next.gif독자서평 쓰기


 

 


저자의 말

선취시; 선시적 듀엔데 영혼의 적기(賊幾)

함허(涵虛) 한 태 호

모든 예술은 검은 영혼의 듀엔데를 드러낸다. 시는 음악과 춤보다 더욱 살아있는 생기/몸으로, 신끼들린 예술의 혼을 필요로 한다. 마른 모래 위를 기어가는 바닷바람처럼 알 수 없는 자욱을 만드는 시적 생기(生氣)! 시도 모든 인간의 울음과 기쁨 위에서 아지랑이 기운처럼 뉴트리노(neutrino) 속도로 스쳐간다.

스페인어 듀엔데(Duende)는 우리나라의 신끼, 혼불, 도까비 정신, 미친 영혼, 홀린 영혼 등과 유사한 예술의 검은 영혼을 의미한다. 인생고해를 창출하는 검은 세력, 검은 영감(靈感), 고통을 벗어나게 해주는 힘, 이런 듀엔데는 새로운 시적 영감으로 작용한다.

선적인 영혼에 홀린 이민자의 꿈과 소원이 포도빛 피부로 흘러내릴 때, 시적 듀엔데 영혼이 고요히 작동한다. 일상에서 반복되지 않으나 영원히 존재하는 생명 기운으로, 시적 듀엔데는 선취시와 선사적 인생으로 되살아난다.
시적 듀엔데의 표현 궤도가 있는가? 영혼의 순환궤도 속에서 넘나드는 시적 표현이 가능한가?

시 속의 듀엔데는 창조력, 창조자이지 해석하는 자가 아니다. 시는 새 것을 창조하는 혼이지, 이미 드러난 것을 새롭게 해석하는 변형자가 아니다. 원시시대부터 이미 많은 것이 창조되었고, 더 이상 창조할 것이 없는 듯한 환상적 현실 속에서, 항상 새로운 신끼로 새로운 원시 형태를 찾아내는, 아니 그와 유사하게 영적 기적을 찾아내는 자가 바로 시인이다.

시인은 더러운 일상사에서 깊은 생의 리듬을 찾아내고, 인생의 끔찍한 침묵과 사악한 의도 속에서 새로운 노래와 춤과 같은 직관적 충동을 만들어낸다. 기존성을 존재하지 않은 듯한 새로움으로 재창조한다. 서구 포스트모던적인 겉 틀, 외적 형식미를 초월하는 시를 추구한다.

이런 창조적 파괴와 파괴적 창조는 어느 예술 형태에서나 발견된다. 허나, 단순한 형식과 표현성의 차이, 비틈, 언어 장난으로 시작되는 예술적 창조는 그 본질적 영혼의 재창조를 올바르게 완성하기가 어렵다. 이 때 언어 작용으로 영혼을 호출하는 시가 기능적으로 더욱 편리해진다.

시에서 듀엔데 혼불은 시적 천사나 음악신 뮤즈와는 조금 다르다. 뮤즈가 사랑과 기쁨의 여신이라면, 천사는 종교와 예언의 종교적 시적 영물이 될 수 있다. 시 속의 듀엔데 시혼은 이런 천사의 영성과 뮤즈의 시성을 넘어선다.

선시와 듀엔데의 영혼성, 시적 영물성도 비교 가능하다. 듀엔데가 죽음의 레몬즙을 짜내며 죽음을 넘어서려는 어둔 신끼라면, 선시는 인생의 동일 성질(생노병사)의 시적 기운을 선기, 즉 적기(賊幾), 육감, 명상력으로 잡아채며 극기하는 영발을 갖는다.
일반 시성의 뮤즈나 천사보다 조금 나은 듯한 듀엔데는 무한자유다. 일생동안, 시인 영혼의 실내에 갇혀 살다가 죽어서야 밝은 대낮으로 풀려나는 영혼의 자유성이 듀엔데 속에 있다. 듀엔데 시성은 죽은 자로서 더욱 잘 살아난다. 땡중 이발사의 푸른 면도칼처럼, 푸른 언월도를 들고 한밤의 영혼을 설쳐대는 섬뜩한 기운도 있다. 이것이 서구식 영혼의 시적 광기로 일어나고, 니체의 영적 미침, 꿈속의 듀엔데 귀성(鬼性)으로 나타난다.

선시는 이런 귀성을 수용하지 않는다. 산신각의 산신 웃음과 해탈/해학으로 모든 귀성을 향기나는 생의 약동으로 드러낸다. 서구식 예레미야 비가(悲歌)의 젖은 운율이나 자연과 죽음 속에 울리는 금속성 가치도 때리지 않는다. 서구 낭만주의 듀엔데 식 시성을 표현하지 않는다. 즉 수도원의 종교 예식복, 마차바퀴, 면도날, 무성한 수염, 보름달, 파리가 날아다니는 부엌 찬장, 폐허지, 깨진 지붕, 검은 두건 쓴 수도승/탁발승, 발코니에서 일어나는 죽음과 사랑의 이야기, 추억, 암시, 속삭임이 없다. 이들은 조사들의 언어주먹 선빵에 날아가버린다.

선시는 이런 중세적 최후 마성과 민들레꽃의 날리는 예술성을 버리려 한다. 대신에, 차가운 정신적 명상을 통한 자아완성, 자기 깨달음이라는 냉철한 현실을 철확처럼 뚫어내려 한다. 꿈속의 비가(悲歌)나 요정 춤이 아닌 현실에 눈뜬 현실주의, 물질주의, 구체적 명확한 행위로 생불이나 도까비 듀엔데 영혼을 잡아채려 한다.

선시는 분명히 섣달 동지 밤에 환하게 불밝힌 횃불을 들고 서있는 요괴스런 여인(저승사자)이 부르는 슬픈 노래가 아니다. 대사원이나 성당의 너른 회랑에서 춤추는 요정이 부르는 영가(靈歌)도 아니다. 선시는 아귀의 피흘리는 지옥 명부의 어둠과 죽음이 널려있는 법당에서 생성되지만, 산수 풍경의 긍정적 밝은 기운이 넘치는 대자연 속에서 지적 이성과 감성적 열정이 함께 어우러진다. 허무한 인생의 비의적 자아성을 홀로 수행하듯이 찾아내는 고요한 법력(法力), 넘치는 수행자적 시기(詩氣)가 넘친다.

나는 이 라틴 풍 듀엔데와 선시풍의 두 바람(산들바람과 적멸무풍) 사이에서 꿈틀거리는 고요의 시성을 쫓는다. 이성을 넘어서는 감성의 도까비적인 듀엔데 시성을 시로 표현하는 시인이다. 나의 시적 무화과는 중동 애급의 밀랍인형 손에서 무궁화처럼 무한히 피어나지 않는다. 그렇다고 룸비니 동산의 보리수 선사의 불심에 갇혀 피어나는 시성도 아니다. 서구식 요정의 악마적 에피그래프는 더욱 없다. 선사의 징두리돌(주춧돌) 위에 부처의 근육과 불경의 초콜렛이 덧칠된 서정시로 혼불을 포착해보지만, 아직도 찔뚝이는 종교의 마른 꽃 냄새를 지울 수 없는 게 탈이다.

낭만적 나르시스 눈물로 직조하는 엘레지의 차가운 기운(듀엔데 詩氣)과 동시에 부처 교리에 매달리는 매미의 사그럭거리는 날개짓과 이성적으로 이해된 차가운 불기(佛氣)를 모두 벗어나고 싶다. 나는 서구 낭만주의 시인들의 멋진 장미 잎사귀에 앉은 작은 거미의 미학을 같이하면서도, 선 조사들의 지적 풍토와 시적 기운을 같이 맡아내는 작은 도까비 영혼이 되어본다.

듀엔데의 죽음의 미학은 내 꿈속에서 매일 일어나고 매순간 사라진다. 나는 선시의 단아하고 냉철한 이성과 금속성 감성 및 시성을 꿈속에서 서정성과 시적 상징으로 조화시킨다. 세레나이드의 가벼운 마음과 동시에 불가의 무거운 지성으로 선시를 선취시로 승화시켜본다.

선취시는 룸비니 동산을 하산한 동자승의 극락원 염불이나 에덴동산을 떠난 아담의 실락원 노래가 아니다. 타령조 모방이나 한풀이 웅얼거림은 더욱 아니다. 위로와 자아만족을 위한 남도 흥타령은 더더욱 아니다. 선취시는 소리와 생각, 동작과 이성 행위가 서로 갈등하는 명상과 시심의 창조로 새롭게 서정성을 격양시키는 실험적 시 창조 작업이다.

우물가에 서서 노란 개나리꽃잎을 깊고 푸른 우물아래로 떨어트리는 어린 소년의 호기심과 시적 꿈이 아무 격조없이 우러나오는 즉흥성, 자유성, 개방성이 넘친다. 이런 열린 영혼의 광합성 작용이 모든 시적 이성과 감성의 부조화를 극복하려고 용틀임한다. 따라서 어느 시적 도구라도 내 시의 뱃전에 묶이지 않는 놈은 없다. 듀엔데의 천사와 뮤즈 신이 도망치지 않도록 내 돛 배에 묶어두고, 동시에 선사의 냉철한 외길 수행과 곧바른 정좌 시심을 바로 얻어내려 한다.

두 요소의 조화가 낯설고, 가까이 앉으나 낯설어도, 서로 영적 교류하는 혼재과정에서 상호 창조적 미소를 나눌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내 선취시의 마술적 효과다! 듀엔데 귀신이 어둠 속에서 세례받으며 밝은 기운으로 다가오고, 선사의 아차 귀신이 밝은 깨달음(이성적 완벽성)과 감성적 순수성으로 잘 버무러진 선취시의 완성을 기대해본다.
이런 마술적 듀엔데를 쫓는 선취시는 독자의 사랑을 유혹한다. 유혹은 타락을 위한 눈길이 아니라, 승화와 성장을 위한 이끌림이다. 듀엔데의 언어 귀신이 암시하는 어둔 눈물의 상징성이 보다 친근하게 이끌고, 선사의 수행적 이성이 강요하는 무거운 지적 높이와 경험(깨달음)이 근육통보다 친근하게 이끈다. 보다 쉽게 사랑받고 보다 적확히 이해되는 시적 인간의 이성과 감성 조화력이 높아진 선취시에서, 독자의 선적 유혹은 시작된다.

시는 결국 표현과 소통 속에서 고민하는 존재다. 이런 고민이 치명적이지 않도록, 시적 흥취와 지적 정교함을 같이 아우를 수 있는 표현수단으로서 선적 기운과 듀엔데의 흥취를 같이 드러낸다. 비록 원하는 시적 표현성을 완성하지 못하더라도, 그 비참한 기운을 신끼로 조금이나마 이룬 희열을 같이 나눠본다. 이런 시적 본질과 종교적 체득성을 엄격히 통합시키려는 시적 조화력이야말로, 참된 지성과 감성의 순수성, 시적 영성을 드러내는 선취시의 예술 작업이다.

우리가 부처의 가장 내밀한 인생 비밀을 훔쳐낼 수 있을까? 모든 시적 영웅이나 광대, 시어 재주꾼이나 욕망꾼은 이런 신의 영역을 침범하고 싶어한다.
이런 지적 감성적 표현작업, 즉 실험시적 표현력은 항상 교묘한, 아주 민감한 두 영역(서구적 듀엔데 시성과 선시적 오감도 시성)의 다리를 넘어야 한다. 인간의 생리적 오감각을 통합시키면서 결국은 영혼의 육감 영역으로 초절해나간다.

내 선취향시의 투우검에 피흘리며 쓰러지는 시우(泥牛, 진흙소)는 있는가? 아직 피흘리지 않고 꿈틀거리는 투우장의 아픈 풍경에서 내 시의 듀엔데와 진흙소의 듀엔데가 얽히고 설키며, “선의 유혹”이 되어 편편이 흩날린다.
선취시의 예술적 진실을 완성하기 위해, 이국의 황야에서 피 눈물 흘리는 시적 듀엔데의 영혼을 축원해본다.



미리보기

서시

선(禪), 손짓하는 추상화

나에게 선은 갓변이 보이는 추상이다,
내 생각과 같이 금방 마르는 아크릴 그림,
칠하는 대로 멈추고, 덧칠하며 사라지는 추상,
그는 항상 내 몸에서 떠나지 않는다.
그 공간의 시학을 벗겨내는 손길이 눈에 보인다.
한 층 한 층, 분리할 수 없는 기억과 틈의 현현(玄玄),
가장 딱딱한 개 뼈다귀로 찰싹 때린다.
(객관이 주관으로 박히며, 내 시간이 멈춘다.)
소리가 사라지는 허공에 멍멍한 귀로 드러나는 상,
그 놈은 살아서 고물락거리는 시로 기어나온다.

소리가 보이기 시작하며 기적이 일어난다.

선적인 폭력이 없으면, 이 세상은 어찌 될까
아마 소리의 예언이 사라지겠지.





소풍 가는 단군

나, 단군 오늘 소풍 간다. 멋진 족보의 머리 깃털 뽐내며 수많은 밀랍인형 행진 앞세워 머나먼 강역으로 순행 나간다. 의심스러운 늘그막 나이에 평화로이 죽음 맞기 위해, 나 떠나노라!

나는 보이지 않는 성당 위에 핀 우담바라 덩굴손. 망치 맞은 촛불 저 너머, 무에 있는지 나 모르나, 나는 먼지 쓴 신선이로다. 저 도시의 새로 돋는 바퀴자국 소음에 마음이 달뜨고, 장어처럼 질투의 불길을 일군다.

내 고상한 허영심, 오늘 아침에 마티스 야수파 마음으로 울려나온다. 고요한 새벽의 기상, 신선한 폭죽의 울림, 망설이는 불평, 초조한 속앓이, 글렌 굴드의 야상곡 위에 떠돌며 정제된 고요한 환상들.

고독한 생의 첨탑이 너무 가까이 떨어진다. 내 당혹스런 발톱이 재치 있게 후퇴하라고 마음을 긁어댄다. 성자의 눈길 찾아 소리 지르는 고통, 나른한 호숫가 물결 따라 마음이 이리저리 기웃거린다.

얼룩말 날쌘돌이, 혼산한 발걸음이여! 내 어찌 그대를 떠날 수 있으리오. 나는 도망치나 마음이 얼어붙고, 홀로 발버둥치나 장례식에서 깜빡이는 등불이로다. 파도 고요히 가라앉고, 나 다시 양성인간 되어, 음이온이 만족하는 발목으로 되돌아온다.





선종, 흑설견의 의미론

개 한 마리가 나의 꿈꾸는 정원에서 짖는다.

내가 광대니? 아니. 내가 애벌레니? 아니. 호수의 조약돌이니 너는 아무리 비가 내려도 이끼 끼지 않는 바위야. 불 속의 장작이니? 너는 결코 재로 타지 않는 소나무야. 그러면 나는 좋은 거니 나쁜 거니? 둘 다 아니야. 왜? 개 같은 악마는 좋은 신을 결코 씹을 수 없어. 그는 다시 짖으며, 많은 그림자에게 풀무질을 해댄다. 너는 한 점의 이기주의 빛이니? 하얀 눈썹이 잠시 망설인다, 나는 태양의 방패야. 이때 페가수스 거미가 뛰어들며 회색피를 토한다, 그럼, 나는 날개 달린 도도새다! 검은 개가 피부 벗겨진 꼬리 떨어트리며, 새벽 고요 속으로 침묵한다.

이제 그는 바람 솟는 날개로 칭얼거리고, 도도새는 날개 없어 킹킹거린다. 그래서 검은 혓바닥 개(黑舌犬)는 도도새에게 날개를 주고, 도도새는 그에게 뒷다리를 준다. 인적 없는 에덴에서 둘 다 만족을 느낀다. (선종이 선정을 베푼다.) 뒤집어 놓은 외날개 신(神)은 외발목의 도도새가 아니다, 이는 삼족오 까마귀가 하얀 삼지창 까마귀가 되지 못하는 이치와 같다.

동이족 까마귀가 오대호수의 도시 위에서 독수리 비행 연습을 하고 있다. 그는 고요히 속삭인다; 선물은 속을 모를 때에만 감사한 법. 그의 존재론이 벌거벗은 꿈의 탑신 위로 퍼진다, 저음으로 조율하고 안개 낀 톤을 맞춘다. 좋은 꿈은 그의 속내 목소리가 걷는 길을 안다.

이제 개구리로 깨어난 개는 내 꿈의 정원에서 다시 잠든다.
그는 살이 붙는 옆구리를 없애기 위해 바람의 칼을 맞는다.
모두 선정을 해도, 검은 혀로 다가오는 견공이다.

 


함허涵虛 한 태 호

선(禪)시인, 문학비평가, 미국 버몬트 스튜디오 입주작가 장학금 수여(2011), 인도 케랄라 세계 시인대회 초청 작가(2007),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세계시인대회 초청 작가(2006), 크로아티아 국제시인축제 초청 작가(2004), 스텔라 문학상 1위 수상(2010), 캐나다 국영방송(CBC) 시 부문 입상(2009), 캐나다 시인연맹(LCP) 회원, 작가 및 편집자 네트워크(WEN) 회원.

•시집 : 『여름의 환』(2006), 『집 없는 지붕』(1992)
•시론서 : 『언어 나침반의 황금가지』(2001),
『현대시와 시적 상상력에 대한 창조적 글쓰기』(2005)
•영시집 : 『A Wooden Ox Rocks Zagreb』(2006)

현재 캐나다 토론토 거주.

주소: 9 Larstone Avenue, Etobicoke, Toronto, ON M8Z 2N5, Canada
E-mail: stevenshano@gmail.com
Blog: http://blog.daum.net/stevenshano (당알진 대아의 두리)
Homepage: http://stevenshano.wixsite.com/theohan

 


서문 … 4
서시 … 7

제1부 떠남의 고수레
제2부 그 순간, 상처 난 무릎
제3부 드림 캐처
제4부 선기(禪機), 끽다거
제5부 내 영혼의 색채와 구성
제6부 구음: 내 영혼에 가장 깊은 상처나는 순간

후기 … 17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