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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시여시(如是如是)

   red00_next.gif저   자 : 안숙경
   red00_next.gif판   형 : 변형 국판
   red00_next.gif출간일 : 2018-02-05
   red00_next.gif페이지 : 168쪽
   red00_next.gifI S B N : 978-89-7737-031-9(03810)
   red00_next.gif정   가 : \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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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사

다시 겨울은
엽서 한 장 들고
눈으로 오고 있다
- 여시여시 64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처절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안숙경 여사.
시를 쓰는 이유 하나만으로 이 삶을 버티고 있는 이 연약한 풀잎. 그러나 저 덕숭산(德崇山)처럼 그 품이 한없이 넓은 보살님.

시가 버림받은 이 시대에
시와 목숨을 맞바꾸려 하는
이 무서운 몸부림이여,
천지신명님들께서는 이 작은 기도에 귀를 기울여 주시길.

누구의 말처럼 인생은 왜 이리 슬픈 것일까.

“아니다 슬픔이 있어야 한다.”(칼릴 지브란의 예언자에서)

우리 모두의 가슴을 이어주는….

2017년 12월 11일 해질 무렵

다모관음 석지현 씀




시인의 말

내소사 일주문을 지나 전나무 숲에 홀려 삼배도 잊고 새처럼 날다, 비단보다 더 고운 단풍을 보았네. 가슴을 붉게 타오르도록 태우다, 천왕문 부릅뜬 눈에 아차 싶어, 무릎 꿇고 두 손 모아 백의관음보살 눈 맞춤 하니, 그늘에 세 들어 사는 그 여자가 색동옷을 입고, 춤추는 화공이 되어 그 방을 칠하고 있네. 어둠 속에 떠 있던 알전구가 빗살무늬를 일으키는 그 방을 오색영롱한 빛을 입히며, 춤을 추듯 칠하고 있네.

관세음보살님!
오늘의 나는 당신의 작품입니다.

‘여시여시’란 제목을 주신 석지현 스님 나무아미타불입니다.
서평을 써주신 동국대학교 불교학부 교수 김호성 교수님 나무아미타불입니다.
불교학술서 출판사, 민족사 사장 윤창화님 나무아미타불입니다.
문사수법회의 영원한 도반 秀淨(박지영) 법우님 나무아미타불입니다.




서평

시인은, 시인이 아니다, 시인이다-자기부정의 고투(苦鬪)와 회심곡(回心曲)
: 김호성(동국대 불교학부 교수)

1
철학이 자기철학인 것처럼, 시 역시 자기시(自己詩)이다. 다른 시인과 다른 자기만의 시세계를 구축하지 않고서야 시인이 될 수 없을 터이다. 그러므로 남과 다른 자기만의 시로서 태어나지
않은 시는 없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적어도 시인이라고 한다면 말이다. 이는 자기시의 첫 번째 의미이다.
“시는 자기시다”라는 명제의 두 번째 의미는, 시는 자기를 목적어로 갖는다는 말이다. 이때 자기는 당연히 시인이다. 그러므로 시는 시인을 대상으로 해서 불리워진 노래라는 뜻이다. 시인 자신의 삶과 업(業), 그리고 그것들이 저장되어 있는 그 거울 안에서 퍼 올린 언어가 시라는 이야기이다. 이러한 두 번째 의미의 자기시는 당연히 첫 번째 의미의 자기시가 될 수밖에 없다. 생각해 보라. 남과 다르지 않은 삶이 어디 있겠는가. 우리는 모두 저마다 DNA가 다르고, 삶이 다르고, 그래서 업조차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런 까닭에 이 세상에 똑같은 시인도 없고, 똑같은 시도 없다.
이런 시철학(詩哲學)을 갖고 있기에, 나는 시인이 자기를 대상으로 해서 노래한 시들을 좋아한다. 시 속에 시인이 보이는 시가 좋다. 결국 시를 읽는 것도 시를 통해서 시인을 읽자는 것 아니던가. 안숙경(安淑敬) 시인 역시 자기를 노래하는 시인들 중의 하나일 것이다. 과문한 탓이긴 하지만, 어쩌면 자기를 노래하는 데 가장 핍진(逼眞)한 시인이 안숙경 시인인지도 알 수 없다. 그렇게 생각한 까닭은, 처음으로 세상을 향해서 물었던 시집 『보름달이 뜨면 배고픈 여자』(천우, 2007) 안에는 비명(悲鳴)이 가득했기 때문이다. 고통의 소리, 고뇌의 소리들 …. 죽는다, 이 이야기를 입에 달고 살았던 것 같다. 그중 한 편을 읽어보자.

나는 눈이 뒤집혔다.
푸른 나무로 있으면서도 사랑받지 못한, 누런 맨살이 찢어진 늙은 사철나무. 곱게 뻗은 단풍나무보다 키는 크다. 늘 괜찮은 척. 짙은 초록으로 입을 가려도, 비밀은 새어 나가기 일쑤. 밤이면 우는 소리에 쥐들이 놀라고, 낮이면 한숨이 새어 나가 새들이 흉내내다. 소문은 노래가 되었다. 억울함도, 서러움도, 잘리고, 비튼 모가지로 쥐도 새도 모르게 죽고 싶다.
- 「사철나무의 노래」 전문

시의 화자 사철나무는 “쥐도 새도 모르게 죽고 싶다”고 말한다. 죽지 않고 살아갈 길을 모색하지 않는다. 삶에 대한 희망을 구하지 않는다. 그저 “죽고 싶다”는 것뿐이다. 『보름달이 뜨면 배고픈 여자』에는 이러한 타나토스(tanatos, 죽음에의 욕망)로 가득하다. 그만큼 그 당시 시인의 삶이 고통스러웠기 때문일 것이다. 정말, 시인에게 구세주는 시였다. 시조차 없었다고 한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시는, 바로 이러한 치유의 효능을 발휘한다. 시인은 아픈 시를, 고통스런 시를 쓰면서 그 아픔을, 그 고통을 이겨간다. 우리 독자들 역시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이 세상 살아가면서 비슷한 아픔과 고통을 겪어왔다. 그렇기에 아프다, 말하는 시를 읽을 수 있었다. 그리고서는 시인이 그랬던 것과 비슷하게 힘을 얻었다.
그렇지만, 그러면서도 동시에 우리 독자들은 시인이 고통의 세계에서 하루 빨리 해탈하기를 바랬다. 지금 이 자리에서, 산몸 그대로 극락(極樂)으로 왕생(往生)하기를 기도했다. 과연, 시
인은 저 어둔 터널을 어떻게 빠져나올 수 있었을까? 세 번째 시집으로 들고 온 『여시여시』에서, 시인의 투쟁사(鬪爭史)를 살펴보려는 까닭이다.

날마다
자살을 꿈꾸며, 만두를 먹고, 정보를 두드리고, 문자를 보내고
꾸역꾸역 구겨진 몸을 끌고 삶을 찾는 척 …

날마다
자살을 꿈꾸며, 칼국수를 먹고, 신문을 찢어가며, 너 때문이야!
소주를 마시며, 삶을 찾는 척 …

날마다
자살을 꿈꾸며, 비타민을 먹고, 삼겹살을 죽이며, 몸은 내숭을
떨지만
뼈가 살을 뚫고 나오는 고통을, 눈물에 빠진 눈동자는 알고 있다.
- 「여시여시 33 - 허위진단서」 부분

이런 시는 아직 시인이 멀리 벗어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어찌 쉽겠는가. 문제는 시인 스스로가 희망을 찾고 있는가에 있을 것이다. 아니, 고투(苦鬪)를 하고 있느냐 라고 물어야 할 것이다. 이 물음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답변이 가능하다. 나름대로 애를 쓰고 있다.

휘감고 있는 불길은 제 몸 자르면서 발끝까지
아픔으로 흘러내린다. 생애가 앓고 있다.
오한으로 떨던 몸부림은 마법에 걸려
파닥거리는 불나비처럼 보인다.
광란의 빛은 창문을 비비다
제 그림자에 놀라 비명 지른다.
녹아내린 가슴마다 미련이 매달리고
희뿌연 광선 사이로 죽은 열정 보인다.
부처님, 제가 밝힌 촛불 보이시죠? 정화시키겠다는 의도와는
달리 또 반란입니다.
- 「여시여시 4 - 촛불」 전문

마지막 연에서, 시인은 촛불을 켜고서 ‘아픔’, ‘오한’, ‘광란’, ‘비명’, ‘미련’, ‘죽은 열정’과 같은 응어리들을 다 ‘정화’하려고 한다. ‘촛불’을 켜고서 그런 어둠을 몰아내고 싶은 것이다. 과격하지 않지만, 은은하게라도 ‘정화’하고 싶은 것이 본래의 ‘의도’였다. 그러나 그런 것이 잘 안 되었다고 말한다. ‘의도와는 달리 또 반란’이 일어나고 말았다. 이 시에 일련번호 4번이 붙어 있는 시이다. 이때 이미 분명하게 ‘정화’하겠노라 선언하고, 싸우고 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에서 인용한 「여시여시 33번 – 허위진단서」는 「여시여시 4 – 촛불」 보다 더 후퇴하고 말았던 것이다.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렇게 앞으로 일보 전진했다가 뒤로 이보 후퇴하면서, 시인은 가열찬 싸움을 해 왔다. 그리고 『여시여시』의 거의 막판, 즉 77번 중에서 76번에 이르러 자기부정의 고투에서 이기고 만다. 그런 뜻에서, 다음의 노래는 전승가(戰勝歌)라고 불러서 좋을 것이다.

천년만년 당신을 찾아
물 안개 춤추는 주목나무 사이를 지나
그늘진 어깨 청잣빛 大悲에
사랑한다는 이 한마디 드리려고
어둔 나를 짊어지고 왔습니다.
지상에서 가장 따뜻한 말로
온몸으로 사랑을 토해내는 토함산은
화엄 속에 비단결 같은 바람까지 일고와
감추고 살았던 얼굴을 들추어냅니다.
본존불 앞에 엎디어
등 시린 기다림을 어루만지며
나에게 가까이 오라
청잣빛 염불에 사랑은 절로 울고 있습니다.
주목나무에 걸려 있는 당신 말씀 새기며
당신 눈 안에서 당신을 닮아 가려 합니다.
키만큼 내미는 아픔을 버리고
날마다 당신 안에 내가 있어 나를 밝힙니다.
우아한 당신 앞에서 아주 작은 중생 환희심에 들떠 있습니다.
- 「여시여시 76 - 토함산 본존불」

토함산 석굴암의 부처님, 그날 참으로 춤을 추었을 것이다. 이 이상 더 아름다고도, 기분 좋은 노래를 들어본 적이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당신으로 인해서, 한 중생이 이제 완벽하게 전의(轉依, 해탈)되었기 때문이다. 아, 우리는 드디어 보게 되었다. 한 ‘죽음’의 시인이 이제 ‘대비(大悲)’를, ‘사랑’을 노래하고 있다. 완벽하게 “나를 밝힙니다”라고 말한다. 기뻐서 팔짝 팔짝 뛰는 경지, “환희심에 들떠 있습니다”라고 말한다. 완벽한 긍정이다.(석굴암 앞에 시비로 세워져 마땅할 시이다.)
우여곡절, 고독한 고투 끝에 시인은 마침내 회심곡(回心谷)을 부를 수 있게 되었다. 나도 시인에게 감사의 인사를 올리고자 하거니와, 무엇보다 이제 시인은 시인 스스로를 축하하고 칭찬해주어도 좋을 것이다.

2
다시 우리는 시인의 고투를 한 번 더 살펴보기로 하자. 도대체 시인을 그토록 고통스럽게 했던 것은 무엇일까? 물론 시인이 시적 형상화를 통해서 간략히 암시만 할 뿐, 명시적으로 미주알 고주알 말하지는 않았다. 여전히 어떤 생활의 문제나 가족사(家族史)가 그 배경에 놓여 있는 것으로 보인다. 첫 시집 『보름달이 뜨면 배고픈 여자』는 바로 이 문제를 말한 시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큰 문제가 있다. 바로, 시인에게 가장 크게 문제되는 것은 ‘시인’이라는 사실 그 자체이다. 다른 모든 시인들과 마찬가지로, 안숙경 시인에게도 꿈이 있다. 그 꿈의 성취가 얼마나 큰 기쁨을 가져다주는지 제3자로서는 알 수 없지만, 그런 기쁨을 시인 스스로 경험한 일이 있다.

대형서점에 보름달이 떴다.
젖무덤을 드러내 놓고
행복해 죽겠다는 얼굴로
그것도 모자라 보라색 남자를 껴안고 있다.
샤갈의 동산에 소풍 온 것 같기도 하고
사이코 드라마 장면 같기도 한 표지화로
시집이 시집을 가는 건가.
갖가지 의미의 이름을 달고
진열된 책더미 속에서
검은 외투를 벗어버리고
뼈 시린 세월을 버리고
詩人의 명암인 시집으로, 당당한 인연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내가 나를 보고 있는 나는
이 첫사랑의 떨림을, 이 황홀함을
그 어떤 詩語로도
표현되지 않는 날이다.
- 「여시여시 16 - 내 이름을 내가 사던 날」 부분

그런데 아쉽게도 늘 이런 기쁨이 찾아오지는 않는다. 꿈은 당연히 충족되지 못한다. 다 채워지지 못하는 시인의 꿈이 이제 시인을 짓누르는 짐이 되고 만다. 어떤 때는 외부적인 데에서 자기고통의 원인을 찾기조차 한다.

글장이니깐
고상함을 끌고 다니며
솔직한 노동에 딴지 걸고
한 끼만 먹고 살아요. 건방진 년.
낭만을 끼고는 술로 끼니를 때우는 게으른 놈.
문학이 거대한 벼슬인 양
문학상과 봉투의 궁합.
회장단과 치맛바람.
순수함을 가장한 비열함.
가소로운 몸짓.
文香이 사라진 문단의 기죽은 귀신들.
짬뽕라면이 기어 올라와
책상 위를 기어 다닌다.
귀양 보낼 곳이 없는 대한민국 문단.
엇박자를 쳐도 신명이 안 난다.
- 「여시여시 1 - 12발 상모 돌리기」

솔직히 말해서, 이 시는 시로서는 다소 문제가 있다. 시 안에, 노동현장에서 파업하며 투쟁하는 투사들의 격문 같은 구절들이 노골적으로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시는 감정을 한 겹 싸고, 간접적으로 말해야 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문제가 있는 시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여기서 굳이 이 시를 인용하는 것은, 그것이 이 시집 전체의 일련번호로는 1번이기 때문이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시인의 자기부정의 고투가 시작되는 출발점이자 이 시집 전체에서 시인이 설정한 과제, 자기부정의 싸움이 벌어지는 전장(戰場)이 바로 이 시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것은 이미 ‘문학이 거대한 벼슬’이 되어버린 ‘회장단과 치맛바람’을 대상으로 할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그것은 투쟁일 뿐 시가 되지 않는다. 시는 내성(內省)이자, 내향(內向)이기 때문이다. 시인 역시 그 점을 너무나 분명하게 알아차린다. ‘시인이라’는 사실의 인식 자체가 하나의 문제, 자신의 문제임을 받아들인다.
자기의식 혹은 자기인식을 불교에서는 만(慢)이라 한다. 교만이라는 말이다. 시인이 교만할 때 시가 나올 수 있겠는가. 부처가 되고 싶은 생각이 없이 부처가 될 수는 없다. 하지만 동시에 부처가 되고 싶은 마음이야말로 부처되기를 방해하는 가장 높은 장벽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시인 역시 (좋은/유명한) 시인이 되고 싶은 생각이 없이 (좋은/유명한) 시인이 될 수 없지만, 동시에 바로 (좋은/유명한) 시인이 되고 싶은 생각이야말로 (좋은/유명한) 시인이 되는 데 가장 큰 방애가 된다.
수행자처럼 시인 역시 외로운 이유이다. 홀로 자기를 부정하는 길에 나서야 하기 때문이다. 그 홀로투쟁 속에서 시인이 얻은 깨침의 목소리를 들어보기로 하자.

글 쓰는 것만이 최고의 삶인 양. 위선의 욕망으로 살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 「여시여시 15 - 내가 떡갈나무인 것을」 부분

詩는 취미지 밥이 아니라고 했다.
어디 가서 詩人이라고 얼굴 내밀지 말란다.
- 「여시여시 20 - 생인손을 앓고 있는 엄마」 부분

詩人이란 이름표를 달고 있는 무게로 소리를 지르고 있다.
옴. 명예의 덫에 걸려 있는 글 귀신을 버리고 싶습니다.
- 「여시여시 40 - 잠자는 지혜」

詩를 한 때는 잘 쓴다고 자만에 빠져 그 詩로 밥 먹고 싶었고,
그 희망이 물거품되자 비열한 감성이라고 몰아붙이고
- 「여시여시 41 - 비열한 감성」

가히 시인의 반성문(反省文)이라 할 만하다. 이제 시인의 가슴에서 ‘시인’이라는 이름표를 시인 스스로 떼어놓으려 애를 쓰고 있다. 『금강경』의 도리 그대로, 시인이지만 시인이 아닐 수 있을 때 비로소 시인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부처가 되는 길과 시인이 되는 길은 하나인 것이다. 아무런 차이가 없다. 시인은 그러한 자신의 길을 ‘문자선(文字禪)’으로 받아들인다.

헛손질이란 진단을 받고, 눈물로 탄식으로 염불하다, 詩를 찢어버리다, 얌전히 기도를 했다. 꿈속에서라도 소성거사를 만나면 거리에서 춤 염불을 할 수도 있고, 천막 속에서 잘 수도 있고, 함께 품바놀이를 할 수 있다고. 징을 두드리며 불판을 벌이겠다고 … 根을 잘라내고. 나를 잡고 있는 集을 버리겠노라고, 절절히 타오르는 다솜마저도 버리겠노라고. 바른 신심으로 우려낸 詩를 일주문에 걸어놓겠노라고 …

부처님,
글품쟁이기에
방편이 文字禪입니다.
정진할 수 있도록
마음자리에 맏뜻의 詩語를 주십시오.
- 「여시여시 27 - 시인의 마음」

앞에서 우리는 시인이 첫 번째 시집 『보름달이 뜨면 배고픈 여자』에서 보여준 고통스런 경지를 벗어나서, 밝은 극락으로 이주했음을 보았다. 그 뒤에는 바로 이렇게 가열찬 투쟁이 있었기에 극락행 열차의 티켓을 살 수 있었을 것이다. ‘시(詩)를 찢어버리는’ 시인의 자기부정은 앞으로도 계속되겠지만, 실제 삶 속에서도 안숙경 시인에게서 시인의 얼굴이 아니라 그저 평범한 보살의 얼굴을 보아온 것이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다. 이제 진짜, 좋은 시를 기대할 수 있는 조건이 무르익었다.

3
마지막으로 언급해야 할 것은 형식적 특이성이다. 우선, 예를 들어보자.

내 고장 6월이면 감자 꽃 틔우는 소리로 가득하다.
소복처럼 아픈 색깔의 꽃무리들은
눈부신 만큼 깊은 상처를 숨기고 있다.
감자 꽃이 마을을 하얗게 덮을 때
저마다 풍경을 안고 떠나는 무리 속에
어머니에게 감자 꽃 상자를 맡기고 떠났다.
아픈 색을 화폭에 담고 싶은 간절함은
세상모퉁이와 숨바꼭질하다 숨어버렸다.
헛배만 부른 세월이 흘러가버렸다.
6월만 되면 감자 꽃이 무르익는데
살 속으로 번지는 그 아픈 색깔은
말 대로 아픈 색깔의 삶이 그려졌다.
관세음보살님, 밤으로 누워 있는 꿈 밖의 세상은 너무 밝았습니다.
- 「여시여시 48 - 감자 꽃 상자」

이 시에서 사실 마지막 연, “관세음보살님, 밤으로 누워 있는 꿈밖의 세상은 너무 밝았습니다”는 없어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 아니, 그렇지 않다. 오히려 없는 것이 더 좋다고 볼 수도 있다. 시를 처음 배울 때 이렇게 쓴다면, 선생님에게 혼이 날지도 모른다. 그렇게 혼내고, 혼나는 것이 맞을지도 모른다. 일반적인 시창작 이론에 따른다면, 그럴 것이라는 말이다. 그래서인지, 달리 이렇게 쓰는 시인의 경우가 떠오르지 않는다. 다만 비슷한 사례로, 15세기 북인도 바라나시의 종교시인 까비르(Kabir)가 있다.

벗이여, 어디 가서 나(神)를 찾느냐?
보라, 나는 그대 옆에 있다.
나는 사원에도 모스크에도 없다.
카바 신전(神殿)에도 까일라쉬(Kailash)에도 나는 없다.
어떠한 종교의식 속에도, 요가와 명상 속에조차
그리고 이 속세를 떠나는 그 결단 속에도 나는 없다.
그대여, 진정한 구도자라면
지금 나를 볼 수 있을 텐데, 바로 지금 이 순간에 …
까비르는 말한다.
“친구여, 신(神)은 모든 생명의 한 가운데이다.”
- 석지현 옮김(『까비르 명상詩』, 일지사)


“까비르는 말한다”라고 전제한 뒤, 그 시의 결론과 같은 메시지를 카비르는 던진다. 시를 맺음하는 방식의 하나로 볼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역시, 그 메시지가 교술적(敎述的)이다. 교술은 메시지 전달에 목적을 둔다. 까비르의 경우, 종교시인이므로 그러한 기법을 선택한 것은 불가피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왜 안숙경 시인은 이 돈호법(頓呼法)으로 결구(結句)를 맺음하게 된 것일까? 어떤 경우에는 미학적으로는 손해를 볼 수밖에 없는, 군더더기 같기도 한데 말이다.
미학적 손해를 감수하고서라도, 시인은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심리적 이유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앞에서 ‘문자선(文字禪)’이라는 말도 나왔지만, 시인의 자기부정을 위한 고투에
불교가 큰 의지가 되고 있다. 신앙의 힘으로 자기 삶을 재정비하고 있고, 그런 과정에서 우러나는 시가 이 『여시여시』 연작시이기도 해서일 것이다. 좀 더 심층적으로 말해보면, 시인은 지금 프랑스 상징주의 시인 랭보(A. Rimbaud, 1854~1891)가 말한 ‘견자(見者)’로서의 시인을 구현하고 싶은 것이다. 이제는 자기 삶을 옥죄고 있던 것들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보고 싶은 것이고, 그러한 것들로부터 해탈되었을 때의 경지가 어떤지를 보고 싶은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본 것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시인은 발견자이다. 남들이 보지 못한 장소(topos)를 시인은 보았다. 그 발견은 길게 길게 말해 온 것을, 한 마디로 축약해서 말할 수 있게 한다. 그것도 시인의 삶과 ‘문자선’에 의지처가 되는 대상-부처님, 관세음보살 등-을 부르면서, 정리하고 싶다. 선가(禪家)에서 ‘한 마디 말(一句子)’로써 모든 것을 커버하려고 하는 욕망 같은 것을 시인 역시 갖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여시여시(如是如是)’라고, 이제는 말하고 싶다. ‘그렇다, 그렇다’라는 말이다. ‘여시’ 진리 ‘그 자체(tathātā)’라는 말이다. 가수 김국환이 부른 ‘타타타’도 바로 그 뜻인데, ‘여시여시’
라는 제목이나 마지막 연의 ‘한 마디 말’은 다 시인이 시인을 옥죄던 그 모든 것-생활이든 시인의식(詩人意識)의 짐이든-을 놓아 버리고 싶은 욕망의 표현이자, 진리를 보는 연습이라고 할 수 있다. 시로서 좀 손해가 나면 또 어떤가. 시인은 지금 바로 그것을 해 보고 싶은 것이다. 시인에게 시는 자기해탈의 ‘문자선(文字禪)’이 아니던가.
(2018년 1월 5일)

 



안숙경

안숙경이란 이름표를 달고
일체중생을 내 몸에 넣어두고
무허가 권진으로 살다가
문사수법회
여여(如如) 법사님 법문을 듣고
수원(秀願) 법우로
매일 태어나는 부처생명으로
살려지고 있는 시인(詩人)
나무아미타불!

첫 번째 시집 『보름달이 뜨면 배고픈 여자』
두 번째 시집 『대책 없는 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