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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초월-독립운동가 초월스님의 불꽃같은 삶

   red00_next.gif저   자 : 김광식
   red00_next.gif판   형 : 신국판
   red00_next.gif출간일 : 2014-06-15
   red00_next.gif페이지 : 284쪽
   red00_next.gifI S B N : 9788998742263
   red00_next.gif정   가 : \15,000

   red00_next.gif독자서평 쓰기

 [품절]


 

 

■ 1919년 4월부터 1920년 5월까지 (…) 근 1여 년 동안 백초월은 독립운동의 다양한 행적을 남겼다. 우리는 여기에서 그가 국내외를 망라해 독립운동을 추진하였으며, 중앙학림 학인들과 혼연일체가 되어 상해 임시정부를 배경으로 활동하면서, 3·1운동 직후 급증한 불교계 독립운동의 중심에 섰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그는 신상완, 이종욱 등을 매개로 상해 임시정부와 긴밀한 협조 관계를 구축하였다. 또한 그는 박달준, 김장윤, 김봉율 등을 매개로 만주 지역 독립군을 후원하는 조직체를 갖고 있었다.-본문 p.93
■ 이처럼 백초월은 1922년 초반 동안 조선불교대회와 연계하여 불교 강연회의 연사로 나섰다. 또한 그는 불교중앙포교소와 관련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매일신보」 1922년 1월 5일 기록에는 “본 교당 백초월사(白初月師)”라는 내용이 나온다.그런데 여기서 문제 되는 것은 조선불교대회와 불교중앙포교소의 성격이다. 조선불교대회는 1921년 11월에 출범한 불교 단체인데, 재한 일본 불교도들이 주축이 되어 이 단체를 조직하였다. 여기에는 일본 불교에 우호적인 한국 측의 재가 불자가 대거 가담하였다. 요컨대 이 단체의 노선 및 성격이 일본 불교 및 조선총독부의 식민 통치에 우호적인 재가 불교 단체였다.-본문 p.107
■ 일제의 첩보 문건에는 백초월의 항일 활동과 일심교에 대한 내용이 상세하게 나온다. 그것에 따르면 백초월은 1918년 청주 용화사에서 포교사로 활동하던 시절에 󰡔화엄경󰡕의 ‘통만법명일심(統萬法明一心)’이라는 구절에 착안하여 일심(一心)에 따라 독립운동을 추진할 수 있다는 신념을 갖게 되었다. 3·1운동을 지속하는 등 다양한 독립운동을 전개하다 일제에 체포되어 갖은 고문을 받자, 그는 휴식을 취하던 1921년부터 본격적으로 일심교 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는 3대 강령, 즉 일심만능(一心萬能), 군교통일(群敎統一), 세계평화(世界平和)를 표방하면서 동지를 모았다. 이때에 그는 비공식적으로 지하에서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1926년부터는 마포의 진관사 포교당에 일심교 사무소를 차리고 조직 활동을 확대·강화하였다. 백초월은 이렇듯 노력을 들여 많은 동지를 포섭하고, 자금도 모금하면서 일심회라는 조직체를 결성하였다.-본문 p.124
■ ≪그 사람은 자기 집이 정미소를 해서 돈도 많이 벌고, 부자였는데 자기 아버지가 초월 스님에게 군자금을 계속해서 주어서 가세가 기울었다고 그랬습니다. 자기 집의 뒷마당에는 대나무밭이 있었는데, 자기가 어릴 때에 아버지가 대나무밭의 옆에다가 항아리를 묻어 놓고, 거기에다 아버지가 계속 돈을 묻어두는 것을 봤답니다. 그러면 초월 스님의 밑에 있는 사람이 와서 그 돈을 가져간다고 그랬어요. 그래서 그 사람은 호기심으로 돈을 집어넣은 며칠 후에 단지에 가보면 돈을 가져가고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초월 스님을 돌중이라고 그랬습니다. 나는 속으로 기분이 나빴어요. 그래 왜 그렇게 생각하냐고 물어보니깐, 그 당시는 절에서 염불이나 불공을 하는 것이 스님인데 백초월 스님은 말만 스님이지 독립운동을 하면서 전국을 안 다니는 곳이 없을 정도이니 그래서 자기는 스님으로 볼 수 없어서 돌중이라고 부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아버지도 돈을 묻으면서 “이거는 돌중에게 갖다 주는 것”이라고 그런 말을 했다고 그랬어요. (…)≫양산 정미소 주인에 대한 구술은 일심회 조직원들이 독립운동에 동참하여 활동하는 내용을 보여준다. 이 구술에는 백초월이 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하여, 독립 자금을 제공하는 장면이 생생하게 나타난다. 우리는 이 구술에서, 독립 자금 기부로 가세가 기울 정도로 그에게 독립정신이 강렬히 일었고, 활동 또한 치열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여기에서도 일심회의 조직체가 비밀 결사체였고, 조직이 분화됐었다는 사실을 엿볼 수 있다.-본문 pp.131~2
■ 눈길을 끄는 대목은, 그에게 강한 민족정신이 용솟음쳤다는 것과 그가 비록 관헌에게는 미치광이나 바보로 행세했지만, 세상 사람들에게는 독립정신을 불어넣고 있었다는 부분이다. 한편 그 시절 백초월은 방 안에 죽은 거북이를 보자기에 싸 두고, 아침저녁으로 거북이를 바라보면서 참선을 했다고 한다. 이 시기에도 일본 형사가 정기적으로 동학사를 내왕하여 백초월을 감시하였는데, 일본 형사가 와서 초월의 방을 쳐다보면 초월은 죽은 거북이에게 알 수 없는 말을 하였다. 그래서 일본 형사는 백초월을 정신이상자로 알게 되었다. 또한 간혹, 백초월이 방안에서 거북이의 노래를 불렀다고 당시 강원의 학인이었던 금암 노스님이 증언하였다. 이 같은 사실로 볼 때, 우리는 그의 민족정신과 독립운동에 대한 열정이 동학사 강사 시절에도 전혀 죽지 않았다는 것을 거듭 확인할 수 있다.-본문 pp.143~4
■ 초월은 불교가 인간화하기 위해 생겼으며, 행동하는 자들을 호위하는 종교라고 주장하면서 불교는 현실에 토착화해야 한다고 거듭 강조하였다. 이와 같은 초월의 논지는 그의 기고문 서두에서 나온다. ≪섭중생계(攝衆生戒)에는 도중생(度衆生)이 지(持)가 되고 불도중생(不度衆生)이면 범(犯)이 되나니 여기에서는 비록 일(一) 중생을 위하여 무량죄(無量罪)를 짓고 삼악도(三惡道)에 떨어져서 백십겁(百十劫)을 지나더라도 중생만 제도(濟度)되는 사(事)이면 그것을 행(行)하나니 여기에서는 섭율의계(攝律儀戒)나 섭선법계(攝善法戒) 같은 것은 중요시하지 않는다.≫즉 초월은 지엽적인 계율에 얽매이지 말며, 중생 구제를 위해 불교와 승려가 전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초월은 바로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 대승불교의 섭중생계(攝衆生戒)를 강조했던 것이다. 말하자면 중생 구제 그것이 승려 및 계율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리하여 그는 일제가 국권을 강탈하고 민중을 착취 및 탄압하는 것에 결연히 맞서 싸웠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초월의 독립운동이 불교 사상에 입각하여 추진됐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동시에, 그의 불교 사상의 깊이가 매우 깊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본문 pp.160~1
■ 1939년 10월, 초월과 일심회가 민족의식을 고취시킬 거사를 단행했던 것이다. 용산역에서 민족의식을 용감무쌍하게 보여줌으로써 중일전쟁의 구도를 깨고, 그로 인해 동포들에게 경각심을 불어넣으며, 만주로 끌려가는 청년들에게는 민족을 절대 잊지 말라는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것이었다. 용산역에서 만주로 가는 군용열차에 ‘대한독립만세’라는 격문을 작성했던 사건은 이런 배경에서 단행되었다. 백초월은 이 사건으로 체포되어 고문과 징역형을 당했으며, 그와 뜻을 함께했던 동지 70여 명도 체포되는 등 이는 대사건이었다.-본문 p.168
■ 일제의 「경성지방법원 편철자료」의 비밀 첩보 문건을 통하여 일심교의 개요 및 성격, 그리고 1939년 용산역 독립 만세 낙서 사건에 대한 전모와 추이 등을 알 수 있었다. 그 사건의 일지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1939. 10. 11: 일심교, 일심회의 차원에서 백초월을 비롯한 6인의 동지가 육군지원병 제도를 반대하면서 반일·민족 사상을 주입·선전하기 위한 차원에서 용산역 수송 열차에 민족적인 낙서를 쓰기로 결정.10. 14: 낙서 감행10. 16: 낙서 발견10. 23: 낙서 용의자로 박수남 체포배후 주동자로 백초월 체포12. 23: 일제가 관계자(6인) 검거, 사건 개요 완전 파악이제 낙서 사건은 운동의 목적, 지향 등에서 분명한 항일 독립운동이라고 이해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운동은 백초월 및 일심회의 치밀한 기획·구상에 의해서 단행된 것이기에 한국 독립운동사, 불교 독립운동사에 당당하게 편입시켜야 할 것이다.-본문 pp.182~3
■ [조영암은] 일제 시대 때, 그가 출가한 건봉사로 내려와서 특강을 하였던 만해 한용운에게, 경학 공부를 하려면 어느 스님을 찾아가면 되냐고 질문하였다. 그러자 만해는 백초월 스님을 찾아가라고 단박에 일러주었다. 그래서 그는 초월 스님이 월정사 강원에 있다는 것을 찾아내 월정사로 가서 배움을 청한 것이 초월과의 인연의 시작이었다고 백외식에게 털어놓았다.-본문 p.217

 

자호 지허(止虛), 법명 만암(卍庵), 별호 백암(白庵).
건국대 대학원 수료(문학박사). 독립기념관 책임연구원, 부천대 초빙교수 역임.
만해마을 연구실장, 대각사상연구원 연구부장 역임.
현재 동국대 특임교수.
󰡔한국 근대불교사 연구󰡕, 󰡔한국 현대불교사 연구󰡕, 󰡔용성󰡕, 󰡔한용운 평전󰡕,
󰡔그리운 스승 한암스님󰡕, 󰡔보문선사󰡕, 󰡔민족불교의 이상과 현실󰡕, 󰡔불교와 국가󰡕 등
한국 불교에 대한 30여 권의 책과 190여 편의 논문이 있다.

 

추천사 ┃ 5
머리말 ┃ 8

뜨거웠던 진관사, 그해 여름
- 비구니스님들의 환희 ● 15
- 초월 스님을 기억하는 사람들 ● 24
- 진관사로 몰려든 언론 ● 31

백초월은 어떤 스님이었나
- 20대에 조실과 강백 ● 47
- 동국대학교 전신, 중앙학림의 초대 강사로 내정 ● 55
- 청주 용화사 포교당의 강사 ● 60

전국 불교도 독립운동본부를 이끌다
- 만해와 용성 스님을 대신하여 ● 67
- 임시정부와 불교계의 연결 구심점 ● 75
- 몸은 부서져도, 결코 좌절할 수 없었던 일편단심 ● 83

한마음으로 민족을 추스르다
- 진관사에서 후일을 대비 ● 99
- 외면으로는 포교 활동, 내면으로는 독립운동 준비 ● 106
- 일심교, 항일 이념으로 내세우다 ● 114
- 전국적인 항일 결사 조직, 일심회 ● 128

방방곡곡에서 학인스님들에게 민족의식을 심다
- 동학사 강원에서 ● 137
- 봉원사 강원에서 ● 148
- 월정사 강원에서 ● 153

대한독립만세와 함께하다
- 용산역 군용 열차 낙서 사건 ● 167
- 항일 비밀 결사체인 일심회가 거사를 단행 ● 173
- 멈추지 않은 독립운동 ● 184

초월 스님을 잊지 못하는 사람들
- 해방이 되었건만 ● 195
- 백락귀 선생의 고독한 행보 ● 203
- 조영암 스님의 헌신 ● 215
- 기념비, 그의 고향에 서다 ● 221

태극기와 함께 우리에게 오다
- 학술 및 문화 행사에서 드러난 초월 ● 229
- 전국으로 파급된 초월의 항일 정신 ● 238


부록
구국당 백초월 대선사 옥사 순국록 / 조영암 ● 249
독립유공자 심사위원에게 보낸 편지 / 백외식(초월 종손) ● 256
구국당 인영 백초월 대선사 순국비문 / 조영암 ● 260
추모시: 옥사하신 백초월 큰스님 / 조영암 ● 265
백초월 스님 / 고은 ● 267
백초월 스님을 아십니까? / 김광식 ● 269

백초월 연보 ┃ 272
참고문헌 ┃ 278

 

천년의 향기를 품고 있는 삼각산(三角山) 진관사(津寬寺)는 고려 현종(顯宗) 2년(1011)에 진관 대사에 의해 창건된 고찰입니다. 삼각산의 서쪽 기슭에 위치한 진관사는 동쪽의 불암사, 남쪽의 삼막사, 북쪽의 승가사와 함께 예로부터 서울 근교의 4대 명찰입니다.

2009년 5월 26일, 진관사에서는 칠성각을 해체·수리하는 과정에서 귀중한 독립운동사의 자료가 대거 발견되었습니다. 당시 발견된 ‘진관사 태극기’를 비롯하여 「독립신문」, 「신대한신문」, 「조선독립신문」, 「자유신종보」의 자료는 역사적 가치가 매우 높습니다.

태극기와 독립운동 자료를 진관사에 소장한 주인공은 백초월(白初月) 스님입니다. 초월 스님은 대중에게는 널리 알려지지 않았지만 한국독립운동사에 큰 공적이 있는 분입니다. 지리산 영원사 출신인 스님은 1920~1930년대에 진관사에 머물렀습니다. 초월 스님은 범어사·해인사 강사를 역임한 이후, 1915년에는 동국대의 전신인 중앙학림의 불교 강사로 내정될 정도로 당시 최고의 강백이었습니다. 20대에 강백과 조실을 역임한 도인이었지만, 3·1운동이 일어나자 일제의 탄압에 굴하지 않고 독립운동에 뛰어들었습니다. 3·1운동 시에 불교계 민족대표였던 백용성 스님과 한용운 스님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자, 초월 스님은 전국 불교도 독립운동본부 격인 한국민단본부를 중앙학림에 두고 불교계 독립운동을 진두지휘하였습니다. 천은사·화엄사·통도사 등에서 모은 군자금을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제공하고 불교청년들을 상해 임시정부와 만주의 독립운동 단체에 보내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불교 사상에 근거한 일심교(一心敎)라는 항일 결사 단체를 만들어 전국 각처에서 독립운동을 치열하게 전개하였습니다. 스님은 1944년 6월 29일, 청주 감옥에서 순국·입적하는 그날까지 독립운동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초월 스님은 진정한 보살의 길을 걸으신 큰스님입니다.

󰡔백초월-독립운동가 초월 스님의 불꽃같은 삶󰡕의 책 출간은 저희 진관사로서도 큰 의미가 있습니다. 이 책을 집필하신 김광식(동국대) 교수님의 노고에 경의를 표합니다. 김 교수님은 백초월의 생애와 사상, 초월 스님의 항일운동, 진관사와 한국 독립운동의 연관성에 대해 꾸준한 연구를 하고 계시는 한국 불교인물사 연구에서 최고의 명성을 갖고 있는 학자입니다. 진관사를 대표하여 그간의 연구에 감사를 드리며 아울러 진관사관련 독립운동사에 관해 연구해 주신 여러 선생님들과 신도회장 전두인 거사님, 진관사 사부대중에게도 진심으로 따뜻한 마음을 전합니다.

다시 한 번 김광식 교수님의 노고에 감사를 드리며, 오늘의 이 법연(法緣)이 상구보리(上求菩提) 하화중생(下化衆生)의 보살도(菩薩道)로 실천되기를 발원합니다.

불기(佛紀) 2558년(2014) 4월
삼각산 진관사(三角山 津寬寺)
주지 계호 합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