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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교의 종교학적 이해(금강학술총서 32)

   red00_next.gif저   자 : 최종석
   red00_next.gif판   형 : 신국판양장
   red00_next.gif출간일 : 2017-05-31
   red00_next.gif페이지 : 456쪽
   red00_next.gifI S B N : 978-89-98742-87-4(93220)
   red00_next.gif정   가 : \28,000

   red00_next.gif독자서평 쓰기


 

 

금강학술총서 32번째 책, 『불교의 종교학적 이해』(최종석 저)가 나왔다. 한국에서 불교를 종교학적 관점으로 다루고 분석한 거의 첫 번째 책이라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이 책은 붓다와 예수의 웃음을 통하여 종교 간의 갈등과 충돌을 넘어 화해와 이해로 나아가는 길을 모색하고, 생태계의 문제에 대한 불교적 해석을 통해 모든 존재가 뗄 수 없는 관계 속에 있음을 자각한 불교의 자비가 열어주는 공존의 길을 사유한다. 또한 ‘환경보살’, ‘생태보살’이라는 개념어를 조어하면서 현대사회의 생태보살이 지녀야 할 생태의식을 정리하였다. 뿐만 아니라 과학만능시대에 불교의 인간관을 새롭게 조명하고, 불교가 동북아시아로 전래되면서 변용되는 과정을 살폈다. 마지막으로 현대사회 속에서 불교의 위상과 미래에 관하여 이야기한다.


◆ 내용 구성

1부 ‘불교와 그리스도교’에서는 주로 불교와 그리스도교를 비교하면서 두 종교가 갖는 유사점에 주목하였다. 「붓다와 예수의 웃음」은 종교 편향의 문제로 두 종교 간의 갈등과 대립의 문제가 대두되던 때 쓴 글이다. 종교 간의 갈등과 대립을 해결할 방안을 모색해 보라는 주문을 받았다. 어떻게 그런 방안을 세울 수 있겠는가? 각각 종교가 갖는 근본 가르침으로 돌아가면 된다고 생각하고 있다가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에 나오는 웃지 못하고 경직된 수사의 모습이 떠올랐다. 교조들의 웃음이야말로 갈등에 대한 해결책이라 생각했다. 붓다가 경전 속에서 빙그레 미소 짓는 장면은 자주 등장하지만 신약성서에서 예수가 웃는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의 신학 중에 ‘웃음의 신학’이 있는 반면 붓다의 미소에 대한 연구로는 불상에 대한 미학적 연구가 있을 뿐이다. 아마도 이 글은 붓다의 웃음이 갖는 의미를 정리하고 밝힌 최초의 글이라고 할 수 있다.
「보살과 의인의 현대적 구원관」에서는 평소 그리스도교의 예수를 보살과 비교하는 것이 과연 자연스러운 것인가 하는 의문을 갖고 있었기에 나온 글이다. 불교의 보살과 그 성격이 유사한 존재를 그리스도교의 의인이라고 생각하며 논지를 전개하였다.
「연기와 공의 종교신학적 이해에 대한 고찰」에서는 팔정도에 대한 현대적 해석을 시도하였다. 팔정도의 근본적인 의미와 가르침을 깨뜨리지 않는 범위에서 새롭게 해석·변주하는 일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왜? 불교의 현대화와 생활화가 이 시대의 불교가 직면한 과제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불교와 그리스도교의 평화」에서 주목한 점은 붓다의 입멸 원인에 대하여 독버섯인가, 썩은 돼지고기인가에 쏠려 있는 전통적 관심에서 벗어나, 왜 붓다는 춘다의 공양을 통해 자신이 입멸할 것을 이미 알면서도 그 음식을 거부하지 않았느냐 하는 것이다. 왜일까? 춘다의 공덕을 빼앗지 않고 무아의 실천을 보이기 위해서이다. 무아는 “모든 존재를 사랑하기 위한 전제 조건”이라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자신과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존재 사이의 벽을 허물고 그들과 관계를 회복하는 것을 무아의 실천이라고 보았다. 붓다는 춘다의 공양을 받아들이면서 스스로 무아의 실천을 보여 주고 있다. 무아는 곧 위대한 사랑의 실천이다. 불교를 깨달음의 종교라고 누구나 알고 있는데, 과연 무엇을 깨닫는다는 것인가? 무아를 통한 위대한 사랑을 깨닫는 것이 아닐까? 다시 말해서 무아는 모든 존재와 궁극적으로 아름다운 관계를 이루기 위한 철저한 자기부정이다. 무아를 통한 진정한 평화는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 간의 올바른 관계가 정립된 상태이다.
2부 ‘불교와 생태 그리고 과학’에서는 생태계의 문제에 대한 불교적 해석을 다루었다. 이 시대의 불자는 개인의 깨달음에 머물지 말고 전 생태계를 향한 의식의 확산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따라서 ‘환경보살’, ‘생태보살’이라는 개념어를 조어하면서 현대사회의 생태보살이 지녀야 할 생태의식을 정리하였다.
「과학시대의 과학격의불교」에서는 과학만능시대에 불교의 인간관을 새롭게 조명하려고 하였다. 한편 서구사회에서 받아들인 불교는 과학적으로 격의시킨 불교가 아닌지 문제를 제기하였다.
3부 ‘불교와 동양문화의 교섭’에서는 불교가 동북아시아로 전래되면서 변용되는 과정에 관심을 두었다. 「신라 미륵신앙과 첨성대」에서 첨성대가 미륵신앙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 살펴보았다. 미륵신앙이 한반도에 전래되면서 기존의 토착신앙인 용신신앙과의 습합과정에 주목하였다. 즉 미르=용=미륵=왕의 도식을 세워 그 관계를 살펴 첨성대의 성격을 규명하려고 하였다. 「불교의 한국화 과정」에서 한반도에 전래된 불교는 이미 중국에서 충(忠)과 효(孝)의 문제가 해결되어 중국화된 불교라는 점에 방점을 찍고 토착화 과정을 살폈다.
4부 ‘현대사회와 불교’는 현대사회 속에서 불교의 위상과 미래에 관하여 비교적 가볍게 스케치한 글들이다. 앞에서 언급된 내용이 변주되어 중복되기도 하고 송두리째 따온 부분도 있다. 여기에 모은 글들은 평소 관심을 가졌던 문제들에 대한 필자의 생각을 정리한 것들이다. 중복되는 부분들이 보이는데 그것들을 빼려다보니 정작 말하고 싶은 의도가 사라지는 것 같아 그대로 두기로 하였다.


◆ 미리 보기


대자유를 위한 궁극적인 깨달음에 이르게 하는 가르침이 불교이다. 다시 말하면 깨달은 자의 가르침을 따라 깨닫겠다는 사람들이 가는 길이다. 그 길을 따라 가는 과정을 수행이라고 한다. 그 수행의 방법은 시대에 따라 아니면 수행자에 따라 각양각색이다. 여기에서 깨달은 자의 깨달음을 깨닫는다는 것은 깨달음이 아니고 ‘깨우침’이라 해야 한다. 불교의 가르침 안에서 무엇을 깨닫는다고 해도 그것은 붓다가 이미 깨달아 놓은 것을 깨우치는 것일 뿐이다. 단식을 하고 밤낮으로 수행기도를 하니까 일상에서 체험할 수 없는 신비롭고 신묘한 것을 느끼고 초능력을 얻게 되었다고 이것을 깨달음으로 안다면 아마도 착각일 것이다. 그것은 깨달음을 종교적 신비체험과 혼동하는 것이다. 만약에 깨달음을 타심통이나 천안통과 같은 초능력을 얻는 것으로 알고 있다면 그것은 더더욱 아니다. 신비적 체험은 지구상에 존재하는 많은 종교에서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연기의 이치를 모르는 어리석음[無明, 癡]을 지닌 우리 중생들은 탐욕심을 가지고 맹목적인 의지작용[行]으로 활동[業]을 한다. 그러한 생활을 하는 가운데 우리의 인식작용[識]은 발생하게 된다. 이때의 인식작용은 무명에 근거하기 때문에 있는 그대로를 볼 수 있는 능력이 없다. 이어 그 수준에 맞는 정신과 육체[名色] 그리고 감각기관[六入]을 형성하게 된다. 감각기관은 각각의 대상을 접촉[觸]을 하게된다. 그럴 때마다 그것에 대해 느낌[受]을 받아들이면서 싫고 좋음[渴愛]을 결정한다. 마음에 드는 것은 차지하고 싶어 하고[取] 싫은 것은 멀리하려 한다. 그러면서 내세에 태어날 재료[有]를 만들어 생로병사가 있는 고통의 세계로 접어들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인생사이다. ―32쪽


열반을 이룬 자는 존재가 갖는 세 가지 특성인 무상과 고와 무아를 극복한 자이다. 붓다는 이 삼법인을 극복한 덕을 자신에게만 머물게 하지 않고 중생과 나누려고 한다. 물(物)·심(心)의 현상은 모두 생멸 변화하여 항상(恒常)하지 않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를 항상한 것처럼 생각하므로, 붓다는 그의 지혜로 일체 만법이 무상하다는 것을 비추는 지덕(智德)의 웃음을 보인다. 존재의 불완전성에서 오는 고(苦)를 극복하고 모든 번뇌를 끊어 버린 붓다는 단덕(斷德)의 웃음을 보이고, 모든 존재는 변하지 않는 어떤 실체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무아(無我)의 깨달음은 모든 존재와의 경계를 허물고 사랑하게 하는 은덕(恩德)의 웃음을 보인다. 이로써 붓다는 중생을 구제하고 해탈케 하는 서원을 세운다. ―46쪽


인간의 영혼이나 내세에 대한 입장이 오로지 종교의 문제로만 국한되지 않고, 오늘날에는 자연과학적인 해석도 이루어지고 있다. 현대과학에서는 영혼을 두뇌활동의 산물로 보고 신체활동과 유기적인 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현상으로 보는 입장이다. 현대사회의 종교문화는 근본적인 문제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요구하고 있다. 뇌과학의 발달과 유전자공학의 발달은 인간 영혼에 대한 문제뿐만 아니라 종교 교리 전반에 걸친 새로운 이해를 요구하고 있다. 이와 같은 현대과학의 성과에 종교는 맞서기만 할 것이 아니라 과학적 성과를 포괄하는 은유와 상징의 지평을 넓혀가야 할 것이다.―54쪽


불교의 무명(無明)과 그리스도교의 원죄(原罪)에 대해서 간단히 살펴보았다. 여기서 공통점과 차이점을 살펴보고자 한다.
첫째는 불교의 깨달음이나 그리스도교의 구원을 위해서는 무명이나 원죄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즉 무명이 있어야 깨달음·해탈이 가능하며, 원죄가 있어야 구원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무명과 원죄는 바로 두 종교의 궁극적 목적인 구원이나 깨달음을 향한 출발점이 된다.
둘째는 무명이나 원죄가 모두 이 세상에 존재하는 고통이나 죽음, 악의 기원의 문제에 대한 물음에서 시작한다. 불교에서의 깨달음의 경지나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구원은 고통이나 악이 없는 상태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실은 엄연히 악이 존재하며, 고통이나 죽음이 존재하는 현실이다. 그런 문제들이 어디에서 기인하는지 그 근원에 대하여 알고자 하는 물음이라는 점에서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셋째는 그런 고통이나 죽음, 악의 기원으로서의 무명이나 원죄에 대한 이론이 부정적인 의미로만 제시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즉, 불교에서는 인간에게 무명이 있음을 바르게 인식하고 그 인식에서 출발하여 끊임없이 정진하면 깨달음〔열반〕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는 희망을 제시한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교의 원죄 이론도 원죄로 인한 은총의 상실이 인간을 죽음과 고통의 길로 이끌었다는 것만 강조하기보다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베푸는 하느님의 은총에 힘입어 구원의 길이 인간에게 열려져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즉, 무명과 원죄는 이 세상을 살아가는 인간들에게 깨달음과 구원의 희망을 제시하고자 하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불교와 그리스도교는 분명히 서로 다른 종교이다. 위에서 무명과 원죄의 유사성을 찾아보았으나, 각각 다른 점도 확연하게 나타나고 있다.
첫째는 그리스도교의 원죄는 선악의 문제에 있어서 나쁜 것이지만, 불교의 무명은 좋거나 나쁨의 선악의 문제가 아니다. 그러기에 그리스도교에서는 악(惡)인 죄에서의 벗어남을 추구하는 것이 구원이지만, 불교에서는 우선 무명의 인식에서부터 깨달음이 시작되는 것이다.
둘째는 악이나 죄의 기원으로서 무명이나 원죄가 모든 인간에게 있는 것이지만, 불교에서 무명은 개인의 문제로 제시되는 반면에 그리스도교에서는 원죄의 ‘연대성’에 대해 언급한다.
셋째는 고통이나 죽음의 기원으로서의 무명과 원죄의 극복방법이 다르다. 우선 불교에서는 무명에서 벗어나 지혜를 얻어 깨달음을 이룰 수 있다고 하였다. 여기에서 그 깨달음의 주체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철저히 자기 자신이다. 자기 자신의 노력과 정진이 결국 깨달음의 경지, 즉 열반(涅槃)·해탈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에서의 원죄에 대한 인식은 결국 그리스도를 통한 하느님의 구원·은총으로 향하게 된다. 물론, 그리스도교에서도 개인의 노력이 간과되는 것은 아니다. 그 구원 은총이란 하느님의 계명〔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 실천과 깊은 연관을 맺고 있다. 그러므로 개인의 노력 또한 중요한 몫을 차지하겠으나 구원의 중심에는 나 자신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있다. 그리스도교에서의 은총은 인간 노력의 대가라기보다는 하느님의 선물인 것이다. ―62~63쪽

불교적 구원인 해탈은 인간 개인에 국한된 구원이 아니다. 왜냐하면 모든 존재는 서로 유기체적으로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시대에 있어서 더욱 요구되는 불교적 해탈의 의미는 세계의 모든 현상이 자신과 관계를 맺고 있음을 깨달음에 있다. 모든 사물이 자신과 관계되지 않은 것이 없음을 알고,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이웃, 즉 생물과 무생물에까지 사랑을 보내는 인간이 이 시대의 사회적 해탈을 이루는 자이다. 이런 해탈의 모델이 보살이다.
여기에서 우리가 보살을 모델로 하여 살 때, 모든 중생〔존재〕과 함께 고통을 나눌 수 있는 자비(compassion)를 회복할 수 있을 것이며, 인격의 우주적 확산으로의 길을 가능하게 할 것이다. 이 시대의 불자들의 모델은 생태보살이다. 얽히고 또 얽힌 중중무진의 관계를 맺고 있는 것처럼 모든 생명·무생명들이 이와 같은 관계 속에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중중무진의 이웃을 끊임없이 사랑하는 일이 바로 깨달음의 길이다. 이 사랑의 구체적인 표현이 생태보살의 실천이고 수행이다.
자연환경문제나 인간환경의 문제는 인간 욕망의 극대화 과정에서 일어난 것이다. 따라서 이 문제는 근원적으로 인간의 문제로 귀결된다. 환경문제는 결국 인간의 문제이다. 때문에 21세기의 환경문화에 대한 접근은 종교적으로 이루어져, 결국 종교문화로 바뀔 때 보다 근본적인 해결책이 나올 것이다. 생태보살은 자연환경 회복에만 원(願)을 세운 보살이 아니라, 인간 환경의 회복에도 원을 세운 보살이다. 생태보살의 수행, 즉 생태보살도가 각 개인의 일상에서 이루질 때 청정불국토가 완성되는 것이다. 불교의 해탈의 생태적 해석을 통하여 이 시대의 해탈의 의미를 찾아야 할 것이다. 즉 생태의식의 종교문화화가 이 시대의 구원이요, 해탈이라는 것이다. ―86-87쪽


도교는 한반도의 민간신앙들과 습합을 하면서 한국종교 지층 속으로 스며들어 다양하게 변용되었고, 이렇게 습합된 이들 도교와 민간신앙은 불교와의 만남을 통하여 다시 새롭게 이해되고 대중적 신앙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또한 도교와 습합된 이들 신앙이 불교와 습합되면서 불교가 이 땅의 전통적 종교로 자리 잡을 수 있게 하는 토양의 역할을 하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245쪽


지금까지 살펴본 첨성대에 관한 여러 가지 견해를 종합해 볼 때, 첨성대는 당시 신라의 관측기술로 보아 순수 과학적 목적에 의해서만 축조된 것이 아니라, 종교적 의미도 함께 내포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아마도 이러한 첨성대에 대한 다양한 견해는 당시 종교와 과학이 그만큼 분리되어 있지 않았음을 의미하는 것일 수 있다. 즉 당시 신라인들은 하늘의 변화를 관찰함으로써 자신들의 상황을 파악하고, 미래를 예언하고 대처했을 것이다. 무엇보다 당시는 농경사회였다. 농경에 있어서 물과 기후가 중요한 요소였으며, 더구나 천후(天候)는 인간이 마음대로 필요에 따라 조절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므로 농경사회 속에서 천문은 중요한 일임에 틀림없었을 것이다. 하늘을 관측하고 하늘을 우러러 신앙하는 당시 농경을 생업으로 삼던 백성들의 염원을 담은 신앙은 무엇이었을까 하는 것이 첨성대의 축조 의미와 기능을 풀어내는 열쇠가 될 것이다. ―267쪽

 

최종석

동국대학교 불교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수료하였다. 독일 자르브뤼켄 대학(Universität des Saarlandes) 종교학과에서 석사 및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그곳에서 동양종교를 주제로 강의하고 연구하였다. 귀국 후에는 동국대학교 불교문화연구원과 사회교육원에서 연구와 강의를 하였다. BTN(불교TV)에서 <비교종교학>과 <한국종교문화의 이해>를 일 년간 강의하였다. 현재 논산에 있는 금강대학교 응용불교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주요 논저로는 『Qi, ein religiöses Urwort in China』, 『불교의 이해』(공저), 『오늘 우리에게 구원과 해탈은 무엇인가?』(공저), 『불교경전은 어떻게 전해졌을까?』(공저), 『현대 예술 속의 불교』(공저), 「Zong-jiao als Äquivalent des Religionsbegriffes in chinesischen Kulturkreis」, 「Qi, Wolken und Wind. Zur Entwicklungsgeschichte des Begriffes Qi」, 「불교의 구원관」, 「Modernisierungsprozesse im koreanischen Buddhismus」 등이 있다.

 

머리말 _ 4

1부. 불교와 그리스도교 ………………………… 15
1. 붓다와 예수의 웃음 …… 17
2. 보살과 의인의 현대적 구원관 …… 52
3. 연기와 공의 종교신학적 이해에 대한 고찰 …… 88
4. 불교와 그리스도교의 평화 …… 110
2부. 불교와 생태 그리고 과학 …………………… 135
1. 과학시대의 과학격의불교 …… 137
2. 생태불교의 필요성과 가능성 …… 160
3. 불교생태학의 이론과 실천 …… 175
3부. 불교와 동양문화의 교섭 …………………… 213
1. 한국불교와 도교신앙의 교섭 …… 215
2. 신라 미륵신앙과 첨성대 …… 246
3. 신라 용신신앙과 불교 …… 278
4. 그리스도교와 도교의 수행 …… 302
5. 한글과 불교경전 …… 332
6. 불교의 한국화 과정 …… 348
4부. 현대사회와 불교 …………………… 367
1. 현대사회와 불교 …… 369
2. 21세기와 불교의 사회화 …… 399
3. 의미분석법을 통한 불교이미지에 관한 연구 …… 421
4. 과학시대의 불교의 인간관 …… 445

 

불교와 그리스도교의 종교적 비전은
붓다의 자비의 웃음과 예수의 사랑의 웃음을 회복하는 것


종교는 대단히 진지하고, 근엄하고, 엄숙하고, 보수적이고, 융통성 없고, 시대에 뒤떨어지는 이미지를 가졌다. 따라서 종교적 교조(敎祖)나 절대자에 대한 이미지도 마찬가지로 근엄한 모습으로 상상하게 된다. 종교 속의 인간도 유희적인 호모 루덴스(homo ludens)나 명랑한 호모 리센스(homo risens)가 아니라 근엄한 인간인 호모 그라비스(homo gravis)를 연상하게 한다.
그러나 앞으로 종교 간의 배타주의를 넘어 서로 인류 공동의 문제를 짊어지고 해결해가야만 하는 불교와 그리스도교는 붓다의 자비의 웃음과 예수의 사랑의 웃음을 회복하여 시대가 요구하는 종교적 실천을 이루어 내야 할 것이다. ―18쪽

보통 사람들은 종교를 성스러운 것이라 여기고, 엄숙하고 경건한 것으로 이해한다. 그래서 종교를 웃음과 거리가 먼 것으로 인식한다. 인간에게 벌을 주는 무섭고 엄한 존재, 인간을 넘어서 있는 지고한 일자(一者)에 대한 외경심으로 사람들은 종교를 인간의 삶과는 동떨어진 어떤 것으로 여긴다. 이는 동양과 서양의 대표적 종교라고 할 수 있는 불교와 그리스도교 양쪽 모두에 해당하는 말이다.

『불교의 종교학적 이해』의 저자 최종석 선생(금강대 응용불교학과 교수)은 이런 종교에 대한 인식이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이 책의 제1부 「불교와 그리스도교」의 첫 번째 글에서 ‘붓다와 예수의 웃음’이라는 주제를 통해 종교에서 웃음의 의미를 회복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종교성’의 회복이라고 보고, 종교에서 웃음의 위상을 적극적으로 복권하고 있다. 웃음이야말로 종교 간에 팽배해 있는 배타주의를 비롯한 모든 갈등의 해결 방안이라는 것이다.
이 글에서 저자는 붓다의 웃음과 예수의 웃음을 비교하며, 예수의 웃음이 자기비움에서 오는 무화(無化)의 웃음, 해방과 사랑의 웃음이라면 붓다의 웃음은 무아(無我)의 해탈과 자비의 대자유를 보여 주는 웃음이라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붓다는 무명을 깨친 자이기에 무명의 삼독을 극복하였으니, 진에(瞋恚)인 화를 낼 수가 없는 존재이다. 따라서 경전에서 붓다는 끊임없이 웃고 있다. 이에 더하여 붓다는 웃을 수 있을 때 웃지 않는 사람을 사특한 사람이라고 할 정도로 웃음을 매우 중요하게 여기고 있다고 말한다.
이렇게 경전 속에는 붓다가 미소 짓는 장면이 자주 등장하지만 한국에서 붓다의 미소에 대한 연구로는 불상에 대한 미학적 연구가 전부다. 이 글은 붓다의 웃음이 갖는 의미를 정리하고 밝힌 최초의 글이라고 볼 수 있다.
반면 신약성서에서 예수가 웃는 장면은 찾아볼 수 없다. 그리스도교 안에서도 웃음은 부정적으로 인식되어 왔던 것이다. 하지만 이는 사람들이 복음서 안에서 십자가의 비극과 그 직전의 사건에 무게를 두기 때문이다. 이에 저자는 14세기 신학자 마이스터 에크하르트(Meister Eckhart) 등의 신학자 등의 해석을 가져와 ‘영원히 웃는 분’인 하느님의 사랑에 대해 이야기한다. 저자는 하느님이 ‘자기비움(kenosis)’으로 기꺼이 즐겁게 예수로 육화되려 했고, 예수는 마찬가지로 기꺼이 웃으면서 육화된 하느님이 자신의 삶 안에서 즐겁고 기쁘게 웃으면서 활동할 수 있도록 철저한 자기비움으로 응답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를 보아도 그리스도인에게 이제 십자가는 더 이상 비극적인 고통의 형상이 아니고, 오히려 자기비움의 절정인 십자가는 예수의 무화의 삶을 드러낸 것이며, 타인을 향한 사랑과 연민의 웃음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저자는 인간을 편견과 이데올로기의 압박으로부터, 도그마와 완전주의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를 지향하게 하는 유머는 인간을 ‘해방시키는 웃음’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그런 유머는 자기 자신에 대한 올바른 성찰에서 시작해, 자기 자신을 비울 수 있게 되며, 이로써 인간은 사랑과 연민으로 이 세상과 세상 사람들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불교의 ‘무아(無我)’개념과 그리스도교의 자기비움(kenosis)은 이런 자기부정을 전제조건으로 해서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음을 맞이한 것도, 붓다가 춘다의 공양을 받아들이면서 입멸을 맞이한 것도 이런 사랑의 완성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21세기 현대 과학문명시대에 맞는 ‘과학격의불교’와
생태중심적 종교윤리의 필요성


현대과학에 무관심하던 종교는 이제 과학적 성과를 포괄하는 은유와 상징의 지평을 넓혀가야 한다. 결국 과학시대가 성숙될수록 종교와 과학은 서로 무관심하고 서로 맞서는 입장에서 벗어나 지난 세기와는 달리 새로운 차원에서 만남을 이루어야 할 것이다. ―138쪽

『불교의 종교학적 이해』에서 또 하나 주목하는 것이 과학과 종교의 관계이다. 저자는 지금껏 종교에서 과학을 바라보는 시각이 너무나 부정적이었다고 지적한다. 즉 과학의 발달은 인간성의 파괴와 함께 생태계의 파괴를 조장시키는 주된 원인이라고 간주하는 부정적 시각으로 일관되어 왔다는 것이다. 그러나 금세기에 들어서 과학에 대한 이러한 부정적 시각이 교정되고 있으며, 오히려 일부 학자들은 종교와 과학의 창조적 만남의 필요성을 주장하기도 한다.
저자는 21세기 과학문명 시대에 종교의 역할과 기능에 대해 고찰하며, 과학시대의 종교는 비의적이고 신비주의적인 모습을 벗어나는 탈신화화의 과정을 계속해서 겪게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즉 신화적이며 상상력으로 이루어진 교리는 탈신화화의 작업을 더욱 요청받게 될 것이라는 말이다. 그리스도교가 자신의 교리와는 거리가 먼 지동설과 진화론을 결국 수용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 그 단적인 예라고 본다.
이렇게 과학시대의 종교는 교리체계에 있어서 가장 근본적인 문제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해석을 요청받고 있는 것이다. 예컨대 뇌과학의 발달로 인해 신체와 영혼이라는 이원론적 인간관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요구되고, 유전자공학의 발달로 인간복제에 대한 다양한 논란과 윤리 문제가 대두되면서 윤회와 업에 대한 진지한 해석이 요구되고 있다. 이처럼 과학의 발달과 함께 기존의 종교 교리체계는 새롭게 정비되어야 한다. 기존에는 종교에서만 다루던 주제들, 즉 영혼이나 내세에 대한 주제들이 이제는 종교와 과학의 융합을 통해 해석 지평을 넓혀가야 하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이에 더하여 저자는 이러한 과학시대에 동양의 종교전통과 근대 문명의 폐단을 극복할 수 있는 대안들이 서구를 중심으로 연구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그에 따르면 동양의 종교 전통 중에서도 특히 불교의 가르침은 굉장히 과학적이고, 과학시대의 미래지향적 종교의 모델이 될 수도 있다. 이는 ‘과학격의불교’를 통해 불교 교리의 과학적 해석의 단초를 열었을 때 가능하다. 저자는 과학시대의 불교는 과학적으로 대응하고, 과학적인 성과를 포괄하여 과학적인 은유와 상징을 펼치는 태도를 보여야 할 것이라면서, 이러한 불교를 ‘과학격의불교’라는 조어(造語)로 명명했다. 그는 과학격의불교는 과학적으로 불교를 해석하는 것을 넘어서 적극적으로 과학적 연구 성과에 대한 해석과 함께 그러한 해석을 가능하게 하는 근거를 불교의 가르침에서 제공하는 것까지 포함하는 것으로 보았다. 저자는 과학시대에 대한 철저한 인식을 바탕으로 과학과 불교의 창조적 융합을 이룬 새로운 개념을 만들어낸 것이다.

또한 과학의 문제와 관련되어 빠질 수 없는 것이 생태문제이다. 저자가 보기에 과학문명이 가져온 폐단인 환경오염 · 환경파괴의 문제는 인간 욕망의 극대화 과정에서 일어난 문제이다. 결국 환경문제의 원인이 곧 인간의 문제, 즉 인간 욕망의 문제라는 것이다. 또 환경문제는 근원적으로 모든 생명체의 존재를 초래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21세기의 환경문화에 대한 접근은 종교문화의 차원에서 이루어져야 근본적인 해결책이 나올 수 있다는 것이 저자의 관점이다. 종교 중에서도 불교의 윤리관은 모든 생명체들이 공존·공생할 수 있는 대안적 윤리관이라고 본다. 저자는 이런 불교의 생태윤리를 ‘생태중심적 윤리(ethics of ecocentrism)’라고 정의한다. 즉 모든 개개의 존재는 존재 전체의 일부로서 서로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기에 생태중심적 윤리공동체는 바로 자연 전체이고 존재 전체와 일치하고 동일한 것이다.
불교의 자비심은 사람뿐만 아니라 동물에게도, 동물뿐만 아니라 식물에게도, 식물뿐만 아니라 돌·물·흙에게도 미치는 것이다. 저자는 이 자비의 생태윤리가 인간중심적 사고에서 야기된 지구환경의 문제를 해결하고, 모든 생명체들이 공존 · 공생해야 하는 21세기의 시대적 가치로 받아들여져야 할 종교적 윤리임을 강조한다. 인간중심적 환경윤리가 생태중심적 종교윤리로 승화되어야 하는 것은 이 시대의 종교적 당위인 것이다.
이에 따라 저자는 ‘생태보살’ · ‘환경보살’이라는 조어를 통해 자연환경 회복에만 원(願)을 세운 보살이 아니라, 인간 환경의 회복에도 원을 세운 보살상을 제시한다.

불교의 목표인 해탈은 바로 나와 이웃이 동일체라는 것을 깨닫고 무한한 자비를 실천함으로써 이루어진다. 이웃에 대한 사랑이 곧 나 자신을 완성하는 길이라는 것을 알고 온 세계를 빈곤과 무지와 괴로움이 없는 이상 세계, 즉 생태적으로 온전한 불국토로 만들려고 노력하는 것이 대승보살적인 삶인 것이다. 이를 다시 말해서 생태보살의 길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81쪽

저자는 생태보살의 수행, 즉 생태보살도가 각 개인의 일상에서 이루질 때 청정불국토가 완성되는 것이라고 보고, 불교의 해탈의 생태적 해석을 통하여 이 시대의 해탈의 의미를 찾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생태의식의 종교문화화가 이 시대의 구원이요, 해탈이라는 것이다.

『불교의 종교학적 이해』는 종교가 발을 딛고 있는 현실적 제반 조건의 변화에 대한 폭넓고도 예리한 인식을 통해 나온 책이다. 이런 인식을 바탕으로 저자는 종교에 대한 기존의 해석 틀을 깨고, 불교와 그리스도교를 비교하고, 과학만능시대의 불교의 인간관을 새롭게 조명하며, 생태계의 문제에 대한 불교적 해석 지평을 넓힌다. 뿐만 아니라 불교가 동북아시아로 전래되면서 변용되는 과정을 살피고 현대사회 속에서 불교의 위상과 미래에 관하여 이야기한다.
이 책은 종교와 관련된 다양한 주제를 통해 종교와 종교, 종교와 과학의 담론들을 융합하여 자신만의 학문의 길을 열고, 종교와 현대사회 관계를 재정립하며, 앞으로 종교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는 저자의 혜안이 빛나는 책이다.